내가 슬픈 것일까요, 내 기분이 슬픈 것일까요?
우리는 “난 슬퍼, 난 우울해”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영어로는 “I am sad, I am depressed” 정도가 되겠지요. 그런데 혹자는 “나 슬퍼 I am sad”가 아니라 “기분이 슬프네 I feel sad” 정도로 말하면 기분 조절에 도움이 더 된다고 하네요.
국어나 영어 모두 문장은 주어로 시작합니다. 우리말은 그리고 나서 목적어, 동사의 순서로, 영어는 동사, 목적어의 순서로 다음 구조들이 따라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리말, 영어 모두 주어를 먼저 선언하고 나서 “어떠어떠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주어가 나라면 그다음의 말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내가 무엇과 동일하든지 하는 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무엇’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되며, ‘무엇’은 이름, 직업, 기분 등 그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무엇인가에 의해서 규정되며 변화합니다.
‘나는 OO이다’라는 문장은 결국 나라는 인간이 여러 가지일 수 있다는 표면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며, 조금 깊게 들어가면 나에게는 매우 여러 자아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난 OO다’라는 문장을 말하며, 나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변화시켜 표현하고 아무런 이질감 없이 그 모든 자아들을 나라는 최상위 자아로 통합합니다. ‘난 OO다’라는 수십 개의 선언 사이에 그 어떤 이음매도 느껴지지 않으며 물 흐르듯이, 요새 표현으로는 심리스 seamless 로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내가 여러 가지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표현 중 하나가 자신의 기분이나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말과 영어에 차이가 있는데 영어에는 be 동사라는 것이 있지요. Be 동사는 존재를 선언하는 동사이죠, 그래서 “I am Ironman”이라고 하면 “난 아이언맨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동시에 Be 동사는 상태를 선언하는 동사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I am sad”라고 하면 “난 슬프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 be 동사가 존재의 선언이라면 “난 슬픔이다”가 되지요. 루카 구아디니노 감독의 영화 “I am love”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이 논리는 우리말에도 억지로 적용해 보면 “난 슬프다”가 “난 슬픔이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 자신을 기분으로 규정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마치 나와 내 감정적 상태가 동일한 것처럼 느껴지고 인식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 억지긴 합니다만 - 나는 나의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혹자는 - 영어권 저자이긴 합니다만 - “난 슬프다 I am sad”가 아니라 “난 슬프다고 느낀다 I feel sad”라고 말하라고 조언하더군요.
우리말에 적용하자면 “난 우울해”가 아니라 “아 기분이 좀 우울하네” 정도로 표현하라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함으로써 일시적인 나의 감정 상태를 나와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 이 대목을 읽고 꽤 그럴듯하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살다 보면 정말 힘든 것은 나의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그중에서도 더 힘든 것은 내가 느끼는 것이 나를 사로잡아 옴짝딸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압도되면 우리는 그것이 모든 것인 것처럼 느껴지고, 그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고, 세상 모든 것이 그때 감정의 색깔로 물들어 보입니다. 만약 그 감정이 매우 부정적인 것이라면 지옥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지요. 이럴 때 만약 우리가 그 감정으로부터 단 1cm라도, 단 1초라도 떨어져 나올 수 있다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난 슬퍼”가 아니라 “내 기분이 (내가 아니라) 슬퍼”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감정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은 생존과 판단에 반드시 필요한 알고리듬입니다. 하지만 간혹 감정은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이 분명하며, 아주 가끔은 우리의 삶을 너무나도 괴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우리 자신이 아님에 대해서 한 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슬픈 게 아니라, 내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