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종이책으로 읽는 것과 이북(E-Book)으로 읽는 것 중 어느 것이 기억에 더 많이 남을까요?
저도 이북으로 책을 많이 읽습니다.
아무래도 종이책은 가지고 다니기가 어렵고, 여러 권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더욱더 어려우며, 어두울 때는 읽기가 어렵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북 리더나 스마트폰, 태블릿, 혹은 랩탑으로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기기들을 하나 챙기면 책을 따로 챙기지 않아도 실질적으로는 무한대로 책을 가지고 다닐 수 있고, 기분이나 집중력, 환경에 따라서 읽고 있던 여러 가지 책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읽을 수도 있으니까요. 책을 읽다가 중요한 부분을 발췌하기에도 이북이 종이책보다 훨씬 편리합니다.
제 자신도 이북을 읽으면서도 “정말 이북과 종이책이 나에게 똑같을까?”하는 의문을 가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연구 결과를 보게 됐습니다. 노르웨이의 안네이 망겐이 실시한 연구인데 그 결과를 요약하면, 이북으로 소설을 읽은 이들보다 종이책으로 읽은 이들이 소설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시간 순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이 더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피험자들에게 소설을 읽게 한 경우 그런 것이니, 서사보다는 지식 자체가 중요한 전공 서적을 읽는 경우 종이책과 이북의 차이가 어떻게 다를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연구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시간을 시간 순으로 배열하는 능력이 디지털 스크린에서보다 물리적 세계, 그리고 인쇄된 페이지 위에서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질적인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시 돌아가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해 봐도 종이책을 읽을 때는 앞에서 벌어진 사건을 찾아보기 위해서 책장을 후루룩 넘기는 경우가 꽤나 많지만, 이북으로 읽을 때에는 페이지를 넘길 때 생기는 찰나의 딜레이가 싫고 귀찮아서 그냥 미루어 짐작하고 넘어갈 때가 많았던 것 같기도 하네요. 이건 아마 매체의 차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이북의 경우 사실 자체를 기억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사건을 발생 순서로 배열하는 것은 종이책에 뒤떨어진다는 것이 밝혀진 사실 같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종이책을 좋아하지만, 보관이나 운반이 너무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할 수 없이 이북을 읽게 되는 경우가 사실 많습니다. 그런데 위의 연구를 알게 된 이후에는 도서관에서 일부러 종이책을 대여해서 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종이책을 읽다 보니 책이라는 물건이 주는 느낌이 참으로 좋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책마다 색깔이 다르고, 표지의 그림이 다르고, 감촉이 다르고, 두께가 다르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손가락 사이에서 비빌 때의 느낌이 다르고, 폰트와 행간이 모두 다릅니다. 폰트를 내가 원하는 대로 강제로 지정할 수 있는 이북도 물론 좋지만, 인쇄된 방식대로 물리적 특징을 부여받고 태어난 각자의 책이 가지는 개성에서도 디지털에서 느끼기 어려운 따뜻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종이책이 가지는 최고의 느낌은 아마도 책을 읽어나감에 따라 왼쪽에 많았던 책장이 서서히 오른쪽으로 옮겨지는 그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책을 잡는 방법도 약간 달라지고, 손에 잡히는 느낌도 달라지는 것이지요. 그 과정이 뭔가 서서히 책과 친해지면서 또 서서히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참 좋습니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면 짧고도 긴 여행 하나가 끝난 것 같기도 하고, 달콤했던 휴일이 끝난 것 같기도 하고, 힘들었던 행군이 끝난 거 같기도 합니다. 책이라는 물건과 그 안의 내용이 주는 복합적인 느낌이 손으로 느껴지면서 이북과는 다른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종이 교과서 대신 태블릿 PC를 지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사실 아무도 알 수는 없겠습니다만, 종이책이라는 물건이 가지는 물성 자체를 충분히 느껴보고, 교과서 말고도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그 감촉을 기억에 담는 것이 아이들에게 나쁠 것이라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습니다. 책은 오랜 시험을 거치며 살아남은 매체인데 굳이 그것을 버려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조금 깊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재는 가벼운 것일까요, 무거운 것일까요.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6) | 2025.02.01 |
---|---|
아이들의 SNS 사용을 제한하는 것은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324) | 2025.01.25 |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일까요, 내 주변의 질서일까요? |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299) | 2025.01.23 |
소크라테스는 책을 읽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지금 기성세대들이 짧은 글을 걱정하듯 말입니다. (253) | 2025.01.16 |
현재는 미래로 가는 관문이겠지요. | 미래와의 단절이 주는 두려움과 현실 도피를 피하는 방법 | 시간의 선형성과 비선형성 (258) | 2025.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