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평등이란 과연 쟁취 가능한 가치일까요? | 커트 보니것의 <해리슨 버저론>

RayShines 2025. 2. 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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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니것이 쓴 <해리슨 버저론>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주제는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더 똑똑하거나 잘생기거나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서는 안 되는 사회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등을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재이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환경은 반드시 조성되어야 하고, 무엇인가를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은 “인간이 (실제로) 평등한가”라는 질문과는 동일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개인이나 사회가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들을 획득하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그것을 유지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아마 “맛있는 것을 먹고, 푹 쉬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제하는 법률을 마련해 둔 사회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므로 강요하지 않아도 누구나 그렇게 하려고 하니까요. 오히려 그것을 너무나 많이 하려고 해서 문제인 경우가 더 많죠.

 

 

 

만약 인간이 정말 평등했다면 대부분의 사회와 정부가 평등이라는 추상적이고 원대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그것을 어기는 이들을 처벌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이 애당초 평등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해보게 합니다.  <해리슨 버저론>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평등해야 한다는 가치를 훼손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이들에게는 그들이 착용한 이어폰을 통해 20초에 한 번씩 소음을 발생시켜 인지기능을 억지로 떨어뜨립니다. 그렇게 해서 “지적인 평등”을 강제로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소설 속의 사회에서 말하는 평등이라는 것이겠지요.

 

 

 

평등과 관련해서 한 번 생각해볼 문제가 평등(equality)이 과연 동질(homogeneity)와 같은 개념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가령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농구나 조정은 키가 큰 선수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스포츠입니다. 이 스포츠에 동질의 개념을 입력한다면 신체조건에 따라 대전 상대를 적절히 구분하지 않았을 때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복싱이나 MMA처럼 농구에도 신장에 따라 체급이 도입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5명이 하는 단체 스포츠니 포지션에 따라 신장에 제한을 두거나, 샐러리캡처럼 평균 신장을 기준 이하로 맞추라고 할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냥 부모에게서 좋은 신체조건과 운동능력을 받고 태어난 선수가 있고 상대적으로 좀 덜 그런 선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평등의 가치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어떤 인위적인 조작이 가해진다고 하면 - 예를 들어 약물 사용 같은 - 신성한 평등의 가치를 파괴했다고 생각하고 엄하게 처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는 우리 사회의 전반에 비교적 폭넓게, 그리고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이들이 타고난 재능으로 더 풍족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 뭔가 반칙이 있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분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에서 평등과 동질을 완전히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평등이라는 개념 내에 동질이라는 개념의 함량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회에서는 더 동질한 것이 평등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회에서는 좀 덜 동질하더라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와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하는 것이 평등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며, 또한 정치적인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고 외칠 때 그 평등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한 번 정도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르고, 각 개인은 하나의 소우주인 동시에, 하나의 블랙박스이기도 합니다. 블랙박스란 입력을 넣었을 때 출력이 나오긴 하지만 어떤 알고리듬으로 그 출력이 나왔는지 그 속을 도무지 들여다볼 수 없는 기제를 말합니다. 인간을 기계라고 한다면 블랙박스의 특성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마다 음식, 음악, 영화, 책, 운동 등 오만 가지 입력을 넣었을 때 내놓는 출력이 완전히 다른데 왜 그런지 알기가 매우 어려우니까요. 이 논리에 어느 정도 수긍한다면 <해리슨 버저론>의 사회가 추구하는 평등, 즉 입력에 반드시 수반되는 결과물까지도 완전히 동질하게 만들겠다는 평등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결과물이 산출되는지 알 수 없는데 결과물을 동일하게 만들 방법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그저 결과를 강요하거나, 결과를 왜곡하는 것뿐일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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