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아보신 적이 있나요? | 치누아 아체베 |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Things Fall Apart

RayShines 2025. 2. 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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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모든 것이 부서져 내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없다면 좋겠지만 누구에게나, 어떤 식으로든 한 번 정도는 그런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치누아 아체베의 <모드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소설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민음사에서 발간된 판의 첫 페이지에는 예이츠의 <재림>의 첫 네 줄이 적혀 있습니다.

 

돌고 돌아 더욱 넓은 동심원을 그려 나가

매는 주인의 말을 들을 수 없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중심을 힘을 잃어,

그저 혼돈만이 세상이 풀어헤쳐진다.

 

Turning and turning in the widening gyre

The falcon cannot hear the falconer;

Things fall apart; the centre cannot hold;
Mere anarchy is loosed upon the world,

 

세 번째 행에 있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즉 ‘Things fall apart’가 이 소설의 원제입니다. 이 소설은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것들로부터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 한 남자와 부족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지키려고 했던 토착 문화와 그 문화를 통해 지켜왔던 가치들은 서구 문명의 의해 잠식당하고 대체되며, 종국에는 그 문화를 상징하는 인물인 주인공 오콩코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껴졌던 것은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빙빙 돌며 서서히 변해가고, 갈수록 나로부터 멀어지며 부서져 내리는 그런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 살며, 각 집단마다 그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도구들을 동원합니다. 신, 제례, 의식, 종교, 미신, 샤머니즘, 불문율, 규칙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촘촘하고 꽉 짜여진 정신적 도구의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구축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지 않은 개인에게는 벌칙이나 형벌이 내려집니다.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 오콩코는 무리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아들처럼 키우던 아이를 살해하기도 하고, 아주 커다란 실수를 하여 7년 간 무리로부터 추방당하기도 하지만 추방에 대해서 전혀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신이 내린 준엄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많은 룰들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들인 동시에 중력처럼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들이라 우리를 숨 쉬게도 하지만 우리를 숨 막히게도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공기와 중력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숨을 쉴 수 없고 땅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도 없겠죠.

 

전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의 인물들이 느꼈던 정도의 거대한 패러다임 시프트나 체제의 붕괴나 사회 문화의 급격한 변화를 겪어본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미세한 수준에서 발생하는 삶의 변화나 그로 인한 혼란감은 겪어본 일이 있습니다. 나에게 익숙했던 많은 것들이 갑자기 변화하거나, 환경이 크게 바뀌거나, 지켜야 할 규칙들이 급격히 바뀌거나, 혹은 나에게 익숙했던 사람이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지거나 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부서져내리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내가 발을 딛고 서있던 지반이 갑자기 흔들리고 쩍쩍 갈라지는 느낌을 받게 되지요. 그리고 불안과 혼란을 느낍니다. 그 혼돈의 한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것이 절대 끝날 것 같지 않고, 언제까지고 그 어둠이 지속될 것 같아서 너무나 두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만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막연하게 기도를 하게 되기도 했던 것 같고요. 그런 정신적 혼란이 발생할 때 우리는 결국 정신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탁할 대상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설령 평소에는 그것에 대해서 믿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그 정도야 할 수 있겠죠. 누구도 그런 누군가를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앞으로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해체와 몰락이 항상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가치와 목적을 쌓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니까요. 혹시 힘든 시간을 뚫고 나가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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