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무위로 돌아가고 싶을 때 | 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RayShines 2025. 2. 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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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지요. 더 적극적으로, 더 완전히 무위(無爲)에 이르고 싶은 의지가 들 때가 말입니다.

 

 


모비딕으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단편 소설 중 <필경사 바틀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아래 내용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 Street”입니다.

제목에 있는 것처럼 배경이 월스트릿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품이 쓰여졌던 1850년대에도 월스트릿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인 화자는 변호사이지만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치열하게 살지는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을 하면서 차분하게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그런 그의 태도는 고객들에게 강렬한 신뢰감을 심어주었고 한 고객은 그에 대해 “으뜸가는 장점은 신중함이요, 다음으로는 체계적”인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일이 늘었고 새로운 직원을 구하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바틀비가 찾아옵니다. 바틀비는 매우 성실하게 마치 기계처럼 일을 합니다.

 

 

 

바틀비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틀비에게 그가 업무를 부탁하자 어느 순간부터인가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을 하며 일을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지 않겠다는 일의 범위가 점점 넓어져 완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바틀비는 집에도 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자며, 끼니도 최소한의 것으로만 때웁니다. 그는 바틀비에게 사무실에서 나가달라고 하지만 바틀비는 그조차도 하지 않겠다고 하여 결국 그가 사무실을 이전해 버립니다. 그 이후에도 바틀비가 건물에서 떠나지 않자 건물주는 그를 부랑자로 신고했고, 결국 바틀비는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 간 바틀비는 식사마저도 거부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교도소 마당의 한구석에서 모로 누워 잠들듯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는 바틀비가 자신의 사무실에 오기 전 워싱턴의 배달불능 우편물 취급부서의 하급 직원으로 일하다가 갑자기 해고당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곳은 “배달할 수 없는 죽은 편지들 dead letter”이 도달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합니다.


“불운으로 무력한 절망 상태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을 떠올려 볼 때, 끊임없이 그런 죽은 편지들을 취급하고, 그것들을 분류해서 불태우는 일보다도 더 그런 절망감을 부채질할 만한 일이 달리 또 어디 있겠는가?”

 

아주 오래전에 그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카피가 등장하는 광고였지요. 전 이 광고가 혹시 바틀비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줄곧 해오고 있었습니다.

 

시스템에 의해 완전히 소진된 한 인간,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전혀 찾을 수 없이 전체를 구성하는 아주 작은 부품이자 소모품으로 살아가며, 삶의 의미를 전혀 느낄 수 없는 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역설, 즉 가장 적극적인 동시에 가장 소극적인 상태는 “내 의지에 따라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을 택하겠다”는 것에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확한 목적지를 갖는다는 것은 편지에게 부정할 수 없는 내재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자신에게 적혀 있는 의무를 다하는 것이 편지의 의미이고, 그로써 편지는 살아있게 됩니다. 그러나 목적지를 상실한 편지는 가치와 의미 역시 퇴색된 것이고, 그저 불태워질 운명입니다. 바틀비는 매일 그런 일을 하며 “내 삶의 목적지와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갑자기 해고를 당하며 그가 매일 불태우던 배달 불능 서한처럼 그 자신 역시 목적지를 잃게 되었다는 절망을 느낀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소각될 예정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편지들처럼 자신도 그저 뭔가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선택을 이번에는 본인의 의지로 한 것이 아닐까요. 편지가 목적지를 잃은 것, 그리고 바틀비가 어느 날 갑자기 전체로부터 버림받게 된 것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저도 어쩌면 바틀비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를 하지만 왜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저 해야 하니까 하는 경우도 많지요. 나보다 큰 시스템에 속해 있고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을 큰 시각으로 조망할 여지없이 그저 주어진 일을 하고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 나갑니다. 아마 그런 느낌을 받으시는 분들이 저 말고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바틀비를 떠올릴 때마다 무의미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위를 택하게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매번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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