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태생적으로 악한 사람들이 있을까요? 흔히들 그런 사람들을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모비 딕으로 유명한 작가인 허먼 멜빌은 실제로 본인이 선원 생활을 해서인지 작품의 배경이 선박이나 항해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모비 딕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다른 유명 단편 소설인 <베니토 세레노>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인 <선원, 빌리 버드 -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역시 함선을 배경으로 합니다. 아래 내용은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선원, 빌리 버드 -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의 원제는 <Billy Budd, Sailor - An Inside Narrative>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빌리 버드는 아름다운 외모, 매력적인 성격, 탁월한 신체 능력을 지닌 완벽한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고향이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축되거나 주눅기는커녕 타고난 외향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여 사랑과 인기를 독차지합니다. 그에게는 너무 흥분하면 말을 더듬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이조차도 흔히 벌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일견 그는 완벽해 보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제가 정말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물은 이 작품의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존 클래거트 John Claggart 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일종의 악을 타고난 인물, 태생적인 악, 순수한 악으로 묘사되니다. 그에 대해 허먼 멜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 잔학한 것을 자행하면서 그런 미친 짓과 동반되는 듯한 목적을 이루는 데 현명하고 건전하며 냉철한 판단을 동원할 것이다. 이들의 광기는 지속적이지 않고 특별한 어떤 목적을 위해 이따금 한 번씩 일어나기 때문에 이들은 미치광이요, 가장 위험한 부류의 사람이다. 이런 광기는 은밀하고 잘 위장되어 있으며, 자족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맹위를 떨칠 때도, 앞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일반인들이 보기에 정상적인 행동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 광기의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 그런 목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결코 없다 - 그 방식과 외적으로 진행되는 양상은 항상 더없이 합리적이다.
클래거트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악한 본성이라는 병적인 기질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사악한 훈련이나 부도덕한 책들, 방종한 생활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가 본래부터 타고난 것이었다. 요컨대, 그것은 ‘천성에 따른 사악함(a depravity according to nature)’이었다.”
존 클래거트는 빌리 버드의 완전함에 대한 질투를 느끼고 있었고, 빌리 버드가 그가 지나가는 길에 수프를 엎지른 것이 그에 대한 분노와 반감에 불을 당깁니다.
그리고 한 명의 단역이 또 등장하는데 그는 덴마크 국적의 지혜를 갖춘 늙은 선원입니다. 그는 빌리 버드에게 존 클래거트가 그를 미워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가 존 클래거트가 숨기고 있는 악의를 어떻게 간파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빌리가 그에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묻지만 그는 답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허먼 멜빌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이 덴마크 사람은 연륜, 그리고 평생을 상관의 의지에 복종해 온 에리하고 영리한 사람들이 겪곤 하는 다양한 체험 덕에 방어적이고 함축성 있는 냉소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 이야기를 하면 존 클래거트가 어떻게든 자신에게 앙갚음하리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죠.
존 클래거트는 빌리 버드에 대한 질투와 분노를 견딜 수 없어 그가 몰래 선상 폭동을 주도하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 합니다.
“그는 자기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원초적인 사악함을 쉽게 감출 수는 있어도 없애 버릴 수는 없다. 선함을 감지하기는 해도 그렇게 될 힘은 없었다. 클래거트 같은 이들의 천성이 항상 그러하듯이 에너지가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그런 천성은, 의지할 만한 것들이 남아 있어도 본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 버리곤 하는 그런 천성은, 오로지 창조주의 탓으로만 돌릴 수밖에 없는 전갈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최후까지 실행해 나간다.”
존 클래거트는 자기 내부의 악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잠깐 숨길 수는 있어도 그가 품고 있는 악의는 정밀하게 은폐된 동시에, 정교하게 조율된 형태로 표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빌리 버드는 그를 차출한 상관 앞에서 자신에게 폭동 주도 혐의의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존 클래거트를 보고는 또 한 번 말을 더듬으며 자신을 변호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빌리의 오른팔이 한밤줌에 발사된 대포의 포신에서 이는 불꽃처럼 번개같이 뻗어” 클래거트를 쓰러 뜨립니다. 그리고 클래거트는 그대로 죽습니다. 빌리 버드의 유일한 결점이었던 궁지에 몰리면 말을 더듬는 습관이 그 자신의 파국을 불러옵니다. 빌리 버드는 결국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이 작품의 존 클래거트는 요새 누구나 쉽게 이야기하는 반사회성 인격 장애,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와 유사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고, 덫을 치고 서서히 조여 들어가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고, 인간을 도구화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그런 인물이죠. 그가 자신의 내부에 숨기고 있는 그 순수한 악은 절대로 우발적으로 폭발하지 않습니다. 세밀하게 설계된 방식으로 큐레이션됩니다. 그것이 이들이 무서운 이유겠지요. 세상에는 꽤 많은 사이코패스가 있다고 합니다. 사이코패스의 권위자라고 불리는 로버트 헤어가 만든 사이코패스 척도 (PCL-R)이 30점 이상이면 사이코패스라고 식별하는데 30점 이상인 비율은 여성 전체의 1%, 남성의 3%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집단이든 2%는 사이코패스가 있다고 하기도 하지요.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잘못된 행동이나 범죄 중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 내리는 평범한 결정의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악의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내린 결정이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연 순수한 악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세상에는 존 클래거트 같은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은 어느 사회나, 어느 문화권에나, 어느 시기에나 존재해 왔습니다. 이누이트 족들은 사이코패스를 쿤란게타라고 부르는 데 이는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자신과 같이 생활했던 인류학자 제인 머피에게 쿤란게타를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빙산 꼭대기에서 밀어버리든지.”
빌리 버드가 이누이트였거나 혹은 규율이 무엇보다 중요한 함선에 승선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의 행동은 정당화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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