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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 | 단절 | 애플 TV | 드라마 | Severance | 후기 | 감상

RayShines 2023. 1. 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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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TV의 드라마 세브란스 시즌 1에 대한 감상입니다.

 

드라마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세브란스는 단절이라는 의미입니다.

Sever는 자르다, 절단하다는 뜻입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인 severance는 “단절” 정도로 번역됩니다. 애플 TV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세브란스 : 단절”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무엇으로부터의 단절이냐는 질문이 떠오를 것인데 드라마의 설정 상으로는 회사에서의 기억과 사생활에서의 기억을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퇴근을 하고 나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회사에서 근무를 시작하면 자신이 외부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 전혀 떠올릴 수 없습니다. 상황을 경험하는 자아가 회사와 회사 외부의 영역에서 두 개로 나뉘며 기억이 단절되는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단절을 위해서 뇌에 작은 칩을 삽입합니다. 그리고 이 시술을 하는 주체는 이건(Eagan)이라는 가문에 의해 운영되는 루먼(Lumon)이라는 기업입니다.

 

누구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커다란 상실을 겪고 그 고통을 하루 8시간이라도 잊기 위해서 단절 시술을 받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은 그 감정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출근하기 전 차에서는 울기도 하고 퇴근 후에는 술을 마십니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자발적으로 단절 시술을 받았을 것이고 아마도 도피하고 싶은 현실이 있거나, 혹은 밝혀지지 않은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서는 회사 내에서의 인격을 이니(innie), 회사 외부에서의 인격을 아우티(outie)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극이 진행됨에 따라 둘을 완전히 별개의 인격처럼 대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이니가 아우티에게 한 행동에 대해 각각 분리된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뭔가를 행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니(innie)와 아우티(outie)는 마치 별개의 인격처럼 취급됩니다.

이니에게는 아우티의 기억이 없습니다. 단절 시술을 받고 첫 출근을 하면 아우티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에 대한 간략한 질문을 합니다. 당연히 이니들은 질문들에 대해서 모른다 - 극 중에서는 “unknown” - 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니들은 아무런 기억이 없는 백지 상태에서 뭔가를 시작하는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기본적인 상식이나 문화적 소양조차도 없을지 모른다는 것인데 이니들의 행동을 보면 그렇진 않습니다. 마치 아우티로서의 일화 기억(episodic memory)만 선택적으로 제거된 것처럼 보입니다.

 

루먼 사는 사소한 것들을 귀중한 것으로 둔갑시킵니다.

극 중 인물들은 Macrodata refinement, MDR이라는 부서에서 일을 합니다. 이들의 업무는 모니터에 무작위로 나열된 것처럼 보이는 숫자들 중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숫자의 무리를 찾아내고 특정한 통에 넣는 것입니다. 이 작업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루먼 사는 인물들에게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는 압력을 가하고 인물들은 실제로 이로 인해 큰 압박감을 느끼며 일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무의미한 업무이지만 현실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따라서 현실적인 가치로부터 빗겨 나있는 이니들에게는 루먼에서 의미가 있다고 강요하며 제시하는 모든 것들이 유의미해집니다. 루먼에서 제공하는 사소한 장난감들, 기념품들, 그리고 멜론, 수박, 다과들이 이니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루먼은 종교를 떠오르게 합니다.

루먼 사는 창립자의 이건 가문의 인물들을 신격화합니다. 영속 - 극 중 perpetuity - 이라는 이름이 붙은 공간에 가면 그들의 상을 세워져 있고 그들의 생가가 실제 스케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이니들은 성지순례하듯 그곳에 가고, 이건의 생가에서 와플을 먹는 시간을 갖는 것이 커다란 포상입니다. 극 중에서는 와플 외에 다른 포상도 있는 것 같긴 합니다. 그리고 루먼 사에서 제공하는 편람 - 극 중 handbook - 은 마치 경전처럼 떠받들어집니다. 이니들은 편람에 관련된 규정이 적혀 있느냐 있지 않느냐, 적혀 있다면 어떻게 적혀 있느냐에 따라 루먼 사 내에서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그들에게 루먼은 마치 종교처럼 작동하고, 편람은 경이 됩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고통스럽거나 수치스러운 기억만 도려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종교나 절대자를 찾는 것은 인간들에게 이상한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식적인 행동으로 보이기도 하고 권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브란스라는 드라마가 제시하는 이슈 중 하나가 루먼이라는 대상으로 종교나 이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먼 사의 건물은 완전한 대칭을 이룬 거대한 타원형의 건물입니다. 마치 종교시설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하는 관리자급의 인물들은 마치 중간급의 성직자들처럼 보입니다. 매우 자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엄혹하고, 규율을 어기면 무자비한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매우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매우 교조적으로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서 의미있다고 하면 그것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태생적인 의미를 갖고 있던 것으로 재탄생합니다. 그래서인지 루먼 사에서 쓰이는 전자기기들은 매우 고루해 보이고, 그들이 만든 컴퓨터 그래픽은 정말 조악해 보입니다. 루먼 사가 인간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칩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기업임을 고려하면 이는 좀 이상합니다. 새로운 투자를 할 필요가 없이 예전부터 쓰던 도구를 그냥 써서 비용을 줄이려는 것인지 아니면 전통을 부여하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극 중의 도구들은 예전 브라운관 TV처럼 투박하게 생겼고, 조작 장치들도 70년대의 라디오 같은 느낌입니다. 마치 이북을 보는 시대에 양장되어 있는 고서를 고집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그것이 어떤 따뜻한 느낌, 복고, 레트로의 느낌이 아니라 묘한 위화감을 조성합니다.

 

루먼 사는 각 부서와 직원들을 단절시킵니다.

루먼 사는 각 부서 직원들의 교류를 의도적으로 차단합니다. 단절시킨 것이지요. 그 방법 중 하나가 회사의 복도를 미로처럼 꾸며둔 것입니다. 그래서 극 중 인물들은 지도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부서 사이의 접촉을 막으려고 할까요. 확실치는 않으나 과거에 어떤 부서에서 일종의 폭동이 일어났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극 중에서도 쿠테타라고 표현되는 그런 복선이 제시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루먼 사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니들에게 아무리 아우티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인간들 사이에 교류가 벌어지면 의견이 생기고 자신들에게 항거할 세력이 형성될 것이라는 예측했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MDR 직원들은 우연히 타부서의 직원 예닐곱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처음 본다고 이야기합니다. 루먼 사는 한 부서의 직원도 매우 소규모로 제한하고, 부서들도 점조적처럼 운영합니다. 규합을 막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마치 독재정권을 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이비 종교 단체의 행태 같기도 합니다.

 

우리도 자발적으로 이니가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브란스라는 이 드라마는 마치 영화화된 소설인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하나의 큰 메타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무엇인가에 진입합니다. 그것은 종교일 수도, 이념일 수도, 아이돌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그때부터 큰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는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악마화하기도 합니다.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정치적 진영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아이돌 그룹의 팬클럽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는 것이 다 그런 맥락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만한 대상,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개념을 사람들은 그 힘싸움에서 벗어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거기서 나오는 자원과 이윤을 취합니다. 드라마 상에서도 루먼의 중관 관리자들은 단절 시술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외부의 기억을 갖고 내부로 들어오고, 내부의 기억을 갖고 외부로 나갑니다. 하지만 이니들은 그러리라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두 같은 동질한 존재로 보는 것이지요. 이것도 현실과 비슷합니다. 정신적인 프레임을 생산해내는 사람들은 프레임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것이 프레임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프레임 내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프레임을 통해 보이는 것 외에는 제대로 보질 못합니다. 단절되는 것입니다. 아우티는 세상을 보고 듣고 배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니에게 의식화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과 정말 똑같지 않을까요.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누가 어떤 행동을 했느냐에 따른 판단이 다르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와 프레임을 공유하는 사람은 아무리 잘못된 행동을 해도 문제시되지 않고, 프레임이 다른 사람이 그 행동을 하면 죄악시하고 악마화하는 일이 너무 흔하게 벌어지니까요.

 

내가 보는 것이 맞는 것인지 의심이 듭니다.

세브란스는 매우 생각해볼 거리가 많은 드라마입니다. 단절은 사람 사이에도 발생하지만, 내 안에서도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피하고 싶은 것, 직시하고 싶지 않은 것, 덮어두고 싶은 것으로부터 나는 자발적으로 단절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의 심연이나 우리의 뇌가 가진 망각이라는 프로세스가 부분적으로 그것에 기여할 수도 있겠지요. 내가 누구이냐는 질문에 답은 외형이나 DNA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똑같은 외형을 가졌다고 해서 누군가가 내가 될 수 없고, 동일한 DNA를 가진 일란성 쌍둥이가 동일 인격체는 아니니까요. 결국 내가 누구이냐를 규정하는 것은 내가 쌓아온 나의 역사, 곧 나의 기억일 것입니다. 경험과 기억은 그 인간의 고유한 것이며, 같은 것에 노출된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주관적 경험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만약 나의 기억 중 일부가 내 안에서 단절되는 것이 나라는 인격을 형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조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만큼 큰 침해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인간들이 만든 많은 관념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아이디어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지만, 내 시각이 왜곡되어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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