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설단 현상 | 귀벌레 |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 기억 회복 운동 | 반발 효과 | 기억의 불완전성

RayShines 2023. 5. 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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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도는데 바로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설단 현상이라고 합니다. 같은 곡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를 귀벌레라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SSD나 플래쉬 메모리처럼 있는 것을 그대로 저장하는 저장장치로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기억은 사실을 저장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기억은 우리가 한 경험이나 우리가 취득한 지식들을 접수한 뒤 재배열, 분류, 해석하여 모종의 새로운 지식을 형성하는데 그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닥쳐올 미래에 더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두엽, 그중에서도 가장 앞쪽에 있는 전전두피질은 미래를 예상하는 데 매우 특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예상을 가능하게 하는 틀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일까요, 당연히 과거의 경험, 그리고 거기서 추출해 낸 교훈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기록하는 서기가 아니라, 이를 상호 연결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창조자에 가깝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것은 컴퓨터가 훨씬 더 잘하지요. 하지만 SSD에 수백만 권의 이북이 저작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들을 지적으로 상호 연결하여 새로운 지식을 추출해 내는 일은 인간이 더 잘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자신의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정보들을 모두 학습한 생성형 AI를 만들어주는 서비스가 준비 중이라고 하니 곧 AI에게 따라 잡힐지도 모르겠네요.

 

1990년대에 미국에서 기억 회복 운동이라는 것이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요지는 최면이나 심상유도법을 사용해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 기억을 되살리고, 그것을 근거로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묻자는 취지였습니다. 그 결과 전체 여성의 3분 1에서 2분의 1, 그러니까 33~50% 정도의 여성이 유년기에 성적인 학대를 당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인구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미국에서만 4290만 명의 여성이 어린 시절에 가족들을 포함한 누군가에게 성적인 학대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략 비슷한 숫자의 가해자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알면서도 묵과한 가족들까지 공범으로 치부한다면 가해자의 숫자만 1억 명이 넘을 것이라는 추산이 가능합니다. 이는 당시 인구의 38%에 가까운 숫자였다고 합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었을까요. 지금은 그랬을 리 없다는 것이 공감대인 동시에, 기억이 날조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뇌가 거짓 기억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꽤나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기억은 입력, 저장, 인출의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기억이 형성되려면 일단 입력, 저장의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인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각각의 단계에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순 없습니다. 따라서 기억에는 빈 틈이 존재하고, 이를 메워 넣는 일이 발생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입니다. 이럴 때 사용하는 비슷한 범주의 과거 기억에서 세부 사항을 빌려 오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냥 상상력으로 채워 넣기도 합니다. 이는 특별히 침입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닌데도 일어났음직한 사건을 상상하고 자신이 이것을 경험했다고 믿음으로써 일어납니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현상인 설단 현상은 매우 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면 어느 정도의 수정이 이루어진 것이든 일단 기억이 저장된 이후에 그 기억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꺼내는 과정, 즉 인출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인출 과정도 늘 오류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설단 현상 tip of the tongue phenomenon 입니다. 익숙한 명칭이나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혀 끝에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을 누구나 경험합니다. 분명 저장은 되어 있는데 꺼내지지 않는 상황이지요. 이것에 대해서 한 가지 설명은 도파민 수치가 너무 높을 때 주어진 시각적 이미지에 맞는 이름을 찾아내는 능력이 봉쇄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제에 너무나 과도하게 집중하기 때문에 다른 주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설단 현상에서 탈출하려면 스스로를 너무 압박하지 말라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정신적인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리면 생각이 자연스럽게 나는 경험 역시 누구나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 단어를 떠올리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떠오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긴장이 풀리고 불현듯 그 단어가 떠오르는 것이지요.

 

이를 반발효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뭔가를 떠올리려고 하면 떠오르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생각이 더 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이제부터 5분 간 아이폰에 대해서는 절대 생각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해보겠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가능하지만 아이폰은 절대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오히려 아이폰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더 뚜렷해집니다. 특정한 음악의 특정한 곡조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현상도 있지요. 그것을 귀벌레 earworm 라고 하기도 하는데 10명 중 9명이 이런 경험을 한다고 합니다. 그 노래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떠오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A라는 곡을 떠올리려고 하는데 B라는 곡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A라는 곳을 들으면 단박에 내가 찾던 곡임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을 떠올리려고 하면 A 대신 B가 떠오르는 것이지요. 이럴 때도 설단 현상 때처럼 다른 일을 하면서 긴장을 풀면 B라는 방해가 사라지면서 A가 떠오릅니다.

 

설단 현상, 귀벌레 현상 등은 모두 우리 기억의 인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에러입니다. 우리의 기억 메커니즘이 그다지 완벽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참고 문헌 :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한나 모니어, 마르틴 게스만),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매튜 워커), 생각은 어떻게 행동이 되는가(데이빗 바드르), 사이코패스 뇌과학자(제임스 팰런), 도파민형 인간(대니얼 Z. 리버먼, 마이클 E. 롱), 엄청나게 똑똑하고 아주 가끔 엉뚱한 뇌 이야기(딘 버넷), 스켑틱(마이클 셔머),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마이클 셔머),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엘레에저 J. 스턴버그), 뇌는 작아지고 싶어한다(브루스 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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