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책과 생성형 AI | Large Language Model | LLM | 바벨의 도서관 | 몽테뉴

RayShines 2023. 4. 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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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M을 탑재한 생성형 AI은 책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어떻게 바꿀까요. 

보르헤스의 소설에 보면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도서관이 나옵니다.

이 도서관은 알파벳의 모든 가능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책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나온 모든 책이 그곳에 있었고, 동시에 지금까지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책들도 모두 책장에 꽂혀 있었습니다. 알파벳의 무작위적 조합이니 어떤 책들은 무의미한 내용을, 어떤 것들은 해석할 수 없는 내용을, 하지만 그 어떤 책에는 진리가 쓰여 있습니다. 혹자는 그 책, 바로 책 중의 책을 발견한 사서가 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중요한 모든 것이 분명히 그 안에 있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도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사서들이 모두 미쳐버려 아무도,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LLM이 현대판 바벨의 도서관입니다.

지금의 생성형 AI들이 탑재하고 있는 LLM(Large Language Model)이 바로 바벨의 도서관과 비슷합니다. LLM은 이론적으로는 디지털화된 세상의 모든 문서를 학습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한정의 문자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아주 가치 있는 것도 있겠지만, 전혀 무용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거짓을 말하기도 하고, 거짓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를 hallucination, 즉 환각이라고 하기도 하고 confabulation, 즉 작화라고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LLM의 목적은 의인화이며, 기능은 말, 그림 등을 산출하여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의 도서관과 다름없는 LLM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아직은 아무도 모를 테지만 말입니다.

 

 

 

몽테뉴는 자신은 자신의 책을 주제라고 말했습니다.

1450년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지식과 의견은 이제 먼 곳으로 옮겨질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시간의 장벽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식이 축적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지적 재산이라는 개념과 동시에 표절이라는 개념 역시 세상에 등장시켰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책을 통해 광범위한 지식을 쌓고 분야를 넘나들며 사고를 전개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서재에서 10년 간 에세이를 쓰면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나의 삶은 끔찍한 불행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중 대부분은 일어나지도 않은 불행이었다.” 사실 그의 생애 대부분의 기간 동안 프랑스는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들 사이의 종교 전쟁인 위그노 전쟁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니 그가 깊은 비관에 빠지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다행스럽게도 몽테뉴는 귀족이었으며 서재에 1500권 정도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의 유럽인들은 아무리 귀족이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이 장서들은 그에게 책 이상의 것, 지식 이상의 것을 주었다고 합니다. 몽테뉴는 일생을 불안과 우울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그의 서재는 그에게 친구를 주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울한 생각이 날 덮쳐올 때면 책이 쌓여 있는 서재로 달려가는 것만큼 날 위로해 주는 것이 없었다. 책은 날 안아주고, 내 머릿속의 구름을 걷어내주었다.”

 

몽테뉴는 책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되는 방법을 탐색한 최초의 인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나는 내 책의 주제이다(I myself am the matter of my book)”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대량생산은 개인이 책을 소유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책을 통해 특별한 한 인간이 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음으로써 평범한 한 개인도 자신에 대한 책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자신은 바로 자신이 읽는 책으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제가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죠.

 

 

 

나 대신 책을 읽고 답해주는 존재가 있다면 우린 책을 읽을까요?

그런데 ChatGPT같이 줄글을 하루에도 몇 만 줄씩 써 내려가는 생성형 인공지능을 보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식을 취득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사실 그다지 효율이 높은 방법이 못 됩니다. 내가 원하는 정보가 잘 요약되어 있는 짧은 글을 읽는 편이 훨씬 더 실용적입니다. 따라서 ChatGPT나 Bing에게 질문을 던지고 AI가 던져주는 요약본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해 주는 방법이라는 것이지요. 구글, 블로그, 유튜브, 인스타, 틱톡 등이 인간에게서 긴 글을 읽는 능력을 앗아갔다면, 생성형 AI는 책을 읽어야 할 주체를 인간에게서 챗봇으로 옮겨놓은 것 같습니다. 책이 존재하는 이유가 인간이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AI를 학습시키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사용자의 하드 디스크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문서를 학습한 개인 챗봇을 만들어주는 스타트업이 있다고 하니 이제 완전히 나에게 맞춰진 아주 똑똑한 개인 비서를 갖게 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전 사실 아이언맨의 자비스를 늘 부러워했었습니다.

 

 

 

하지만 책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만 읽는 것은 아닙니다.

책은 매우 개인적이며 내밀한 경험이고, 자기 자신과의 적극적인 대화이며, 내 안에서 벌어지는 활발한 연계 작용의 촉매입니다. 책을 많이 읽은 똑똑한 가정교사를 24시간 옆에 두고 있으면 편리한 점이 많을 것 같긴 합니다. 조금 더 이성적이고, 어떤 경우에는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책을 읽으며 상대방과 나의 감정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으며, 그 이해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켜켜이 쌓아온 지적 기량과 한 데 어우러지며 나라는 인간에 대한 자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새는 ChatGPT가 만들어 낸 문장이 아니라 책을 계속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것이 아무리 낡은 방식이라고 해도 책에는 책 이상의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 자료 : economists, 우울할 땐 뇌과학(알렉스 코브), 미학 오디세이 2001(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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