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인공지능 프로이트 무의식 | 생성형 AI | Freud | Unconscious | LLM | Large Language Model

RayShines 2023. 4. 25. 00:00
반응형

프로이트는 자신이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의 뒤를 이어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는 왕좌에서 끌어내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프로이트 이전에는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이 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 사람들은 우주 전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 일어난 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그런 지구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견해가 폐기됐습니다. 더 나아가 지구는 광활한 우주에서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할지 모른다는 자각을 하게 됐습니다. 만물의 영장이었던 인간에게 가해진 첫 번째 모욕이고, 첫 번째 퇴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 다윈의 진화론이 한 번 더 인간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닐지는 모르나, 그래도 신이 창조한 완벽한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믿고 있던 인간들에게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생각을 이식한 것이지요. 더 정확하게는 인간과 현생 유인원에게 공통 조상이 있다는 생각이었으나 당시 사람들은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진화라는 개념 자체가 모욕적이었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신이 어떤 목적을 갖고 창조한 생명체가 아니라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 그리고 무작위적 환경에 대한 무작위적 적응의 결과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앗아가 버렸습니다. 이로써 인간의 존엄에 대한 두 번째 모욕이 가해지고, 인간은 두 번째로 왕좌에서 끌어내려졌습니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등장했습니다.

물론 프로이트가 인류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무의식이라는 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프로이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쇼펜하우어는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의 중요성의 설파한 적이 있다고 하며 프랜시스 골턴 역시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에 훨씬 앞서 플라톤은 인간을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모는 마차부에 비유했습니다. 인간을 부추기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대해 프로이트 이전의 현인들 역시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대중화시킴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 혹은 정신, 혹은 뇌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의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하는 행동이 어쩌면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장악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이로서 인류에 대해 마지작으로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졌습니다. 나를 조종하는 것이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인간의 의미를 한 번 더 퇴색시켰습니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과학의 손길이 순진한 자기애에 가하는 세 가지 심각한 폭행을 견뎌야 했다.”

 

사실 프로이트는 마음과 뇌를 연결시키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요새 표현으로 하면 신경과학적인 설명을 하고 싶어 했으나 뇌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한다고 판단하여 심리학적 설명으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자신의 정신분석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하고부터는 생리학, 해부학적 근거에 흥미를 완전히 잃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 히스테리를 뇌의 문제로 설명하려고 했던 장 마르탱 샤르코에게 선을 그었습니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나는 히스테리성 마비의 병소가 신경계의 해부학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데, 히스테리가 마비 및 기타 징후를 나타내는 과정에서 마치 해부학적 원리가 존재하지 않거나 그에 대한 지식이 일절 없는 듯한 특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대중화시켰습니다.

프로이트는 우리 안에 우리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있으며, 그 심연 안에 우리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우리에게 선사, 아니 일방적으로 내던졌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제 대부분 무의식이라는 말을 씁니다.

 

 

 

중국어 방 논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존 설 John Searle 의 중국어 방 논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방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컴퓨터가 한 대 있습니다. 방의 한쪽 창구로 한자가 쓰인 종이를 넣으면 컴퓨터는 그 한자를 스캔한 뒤 옥편을 찾아 그 한자의 의미를 반대편 창구로 출력합니다. 그렇다면 이 컴퓨터는 한자를 이해한 것일까요? 존 설은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단순히 이것은 기호를 조작하는 일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진정한 이해는 그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LLM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의가 벌어집니다.

비슷한 논쟁이 LLM(Large Language Model)에 대해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워싱턴 대학교의 에밀리 벤더 Emily Bender 는 LLM는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LLM은 엄청난 양의 문서를 사전 학습한 뒤 상황에 맞춰 뿌려대는 것, 즉 그저 인간의 말을 따라서 외우는 앵무새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여기에는 사고와 같은 인간 본연의 과정 같은 것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LLM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과 구분하기 어려운 어떤 능력을 가진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알파벳의 Blaise Agüera y Arcas은 LLM을 단순한 babbler, 그러니까 그냥 마구 지껄이는 어린아이로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반박합니다. 그는 LLM이 “어떤 것의 의미를 아는 능력”과 쉽사리 구분할 수 없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법에 맞는 문장을 구사하고, 농담을 설명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섬뜩한 것 Das Unheimliche”(영어로는 Uncanny)이라는 저서에서 “의인화된 것들이 정말로 살아 있는지에 대한 의심”이라는 문구를 썼습니다. LLM을 차용하여 고도로 의인화된 AI들은 살아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인간에게도 자신이 모르는 무의식이 있듯, AI에게도 그 디자이너조차 모르는 심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에밀리 벤더의 말이 맞다면, 즉 LLM을 탑재한 생성형 AI들이 스스로 뿌려대는 문장의 의미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이 그저 순열을 산출해 내는 것이라면 사고와 이해가 인간의 고유의 능력이라는 주장은 지속될 것입니다.

 

만약 Blaise Agüera y Arcas가 옳다면, 그리고 AI를 프로이트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깊은 곳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어 우리를 움직인다면 AI의 회로 기판 아래에도 그것을 만든 우리조차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양육 과정에서 부모가, 심지어는 아이조차 의식하지 못한 심리적 상흔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혹은 눈감기 직전까지 그 사람의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긴다는 프로이트적 생각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부지불식 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흔한 말로 무의식 중에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으며, 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 이는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상식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AI에 대해서도 그런 이해가 필요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참고 자료 : economists, 라마찬드란의 두뇌 실험실(라마찬드란), 뇌로부터의 자유(마이클 가자니가), 더 브레인(데이비드 이글먼),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존 카치오포, 윌리엄 패트릭), 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역사(조지프 르 두), 빈 서판(스티븐 핑커), 뇌 과학의 모든 역사(매튜 코브), 통찰의 시대(에릭 캔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