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 Jekyll | Hyde | 성선설 성악설 | 찰스 다윈 | 종의 기원 | 진화론

RayShines 2023. 7. 4. 00:00
반응형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1886년에 발간되었습니다. 1859년에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었고, 1872년에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을 출간했습니다.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라는 유명한 소설은 누구나 한 번쯤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원제는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입니다. 지금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소설이고,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우리의 내면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으며, 그 둘은 늘 경합하며 이기는 쪽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여러 명의 내가 있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된 아이디어입니다.

우리 안에 여러 명의 우리가 있다는 생각은 근대의 생각이 아닙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에 비유했었습니다. 프로이트 이전에 쇼펜하우어는 무의식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대중화하고, 이드, 자아, 초자아 등 우리의 정신을 점유하고 있는 여러 가지 추상적 장치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우리 자신에 대한 의심과 확신을 동시에 가져다주었습니다.

다윈이 진화론을 세상에 내놓은 뒤 인간들은 많이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사실 다윈의 아이디어는 우리와 유인원들이 공통 조상을 가지고 있으며, 아주 오래전에 분기되어 서로 다르게 진화했다는 것이었지만 세상은 우리가 원숭이의 후손이라고 이해를 했죠. 간편한 방법이긴 합니다만, 이것이 종교적인 세상에 불러일으킨 반감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다윈이 진화론의 발표를 자신의 사후로 미루려고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에 살고 있던 다윈 역시 진화론이 가져올 후폭풍에 대해서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 아니면 원숭이라는 흑백 논리가 생겨났을 수 있었겠죠.

우리가 원숭이의 후손이라는 정제되지 않은 생각은 당연히 인간과 원숭이의 구도로 이원화되었습니다. 신이 창조한 인간, 그래서 완전무결하고 진화적으로 최종 버전에 해당하는 생명체인 인간과 문명화되어 있지 않고 원시적이며 동물적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원숭이, 둘 사이의 반목 구도가 형성되었죠. 당연히 승자는 인간으로 미리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저자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에게도 스며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하이드 씨가 가진 악함은 유인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암시가 많다고 합니다.

 

작품 속에서 하이드는 유인원 같았고, 손에 털이 많았고, 원숭이처럼 뛰어다녔으며, 유인원같이 분노했다는 문구가 나옵니다. 반면에 지킬 박사는 왕립학회 회원에 근사한 외모를 가졌고, 부지런하고, 존경을 받는 도덕적인 런던의 의사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에 부응하는 그런 인물이지요.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동물적 본성이 유인원에게서 왔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추악한 본능은 인간이 가진 뛰어난 능력으로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악한 본성은 억압되어 사라진다는 결말이겠지요.

 

 

 

우리는 선할까요, 악할까요.

우리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마도 아주 오래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 중 어느 쪽을 고르느냐에 따라 인간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도 굉장히 큰 차이가 생깁니다. 정치적인 견해의 차이도 여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고, 경제적 구조 내에서 구성원들에 대한 규제의 정도 역시 이 해묵은 논쟁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늘 그렇듯 정답은 양 극단의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만큼 합리적이지 않고, 우리 자신의 예상만큼 일관적이지 못합니다. 반면 우리는 우리의 기대보다 선하기도 하고, 타인의 바람만큼 희생적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내부의 선과 악을 담당하는 기관들 사이의 컨테스트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복잡한 칵테일의 최종적 혼합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단지 어떤 상황에 놓여져 결정을 내렸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선과 악은 행위의 결과에 대한 사후 평가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행동은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결과를 내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으로 선행을 행한 것이 되기도 하니까요. 우리는 그저 여러 가지의 혼합물일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다는 믿음은 선하고 싶다는 욕구의 투영일 수 있으며, 우리가 악하다는 믿음은 선해야 한다는 의무를 명령하는 방법일지 모릅니다.

 

참고 문헌 : 습관의 알고리즘(러셀 폴드랙),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리처드 랭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