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잊어버리는 것의 중요성 | 망각의 중요성 | 과잉기억증후군의 문제점 | HSAM | 서번트 증후군 Savant | 솔로몬 셰레셰프스키

RayShines 2023. 7. 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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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잊을 수 있다는 것,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망각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그런 것을 photographic memory라고들 부르기도 합니다. 한 번 본 것을 그냥 사진을 찍듯이 기억해 버리는 능력을 말합니다. 영화화된 소설인 스티그 라르손의 <용 문신을 한 소녀>의 주인공이 그런 기억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데이비드 발다치의 소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의 주인공 역시 사고 이후 후천성 과잉기억증후군(HSAM Highly superior autobiographical memory)을 갖게 됐으며 이 능력을 바탕으로 수사관으로 일합니다. 그런데 과연 한 번 본 것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것,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기만 한 것일까요.

 

 

 

솔로몬 셰레셰프스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고통받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솔로몬 셰레셰프스키(Solomon Shereshevsky)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무작위로 나열된 숫자나 앞뒤 맥락이 전혀 없는 정보, 여러 페이지의 낯선 외구어 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과학 공식도 문제없이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다시 외워보라고 했을 때에도 틀린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진정한 photographic memory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냥 피상적으로 들었을 때는 우리의 그의 능력이 부럽습니다. 만약 변호사나 의사 같이 암기력이 중요한 직업을 갖게 되었다면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무의미한 정보들이 너무 많이 저장되어 있는 것에 매우 큰 부담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과도하게 축적된 정보들을 중요한 순서로 우선순위를 매기고 불필요한 것을 여과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잊지 못한다면 고통도 사라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지 못한다면, 그리고 과거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느껴졌던 고통스러운 감정을 잊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긍정적인 부분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부정적으로 편향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저장된 모든 기억 중 부정적인 감정 기억에만 집중하게 되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서번트 증후군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난 기억력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는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기억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변 환경을 어제와 완전히 동일하게 구성하려고 합니다. 의식을 치르듯 특정한 루틴을 따르고, 주변 사물들을 자신이 정해둔 형태로 배열하지 않으면 높은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어제와 다르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어제와 오늘을 똑같이 구성하려고 해도 사실 어제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핸드폰이 어떤 방향으로 놓여 있었는지, 볼펜들은 어떤 색깔 순서로 놓여 있었는지 잘 모르죠. 다 잊어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어제와 오늘이 조금 달라도 오늘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조금 지루하긴 하지만 어제와 거의 비슷하게 느껴지고 그 안에 익숙함과 안정감을 찾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조금 달라도 우리는 어제와 오늘이 불연속적인 것이라고 인지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변화는 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주변 환경의 모든 것을 1mm도 틀리지 않게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가정을 해보면 어떻게 될까요? 어제와는 달리 오늘 책상 모니터가 왼쪽으로 조금 움직여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오늘이 어제의 복사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 만났던 직장 동료의 머리카락이 오늘은 아주 미묘하게 달라졌다고 하면 어제 봤던 그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세부사항을 다 기억하게 되면 세부사항의 차이가 전체를 부정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면도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거뭇한 수염이 나 있는 직장 동료가 어제의 그 동료와 같은 사람이라는 추론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사소하게 변화해 왔던 그 사람의 세부사항은 모두 잊고, 즉 망각하고 그 사람이 장기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반적 유사성을 하나로 엮어내서 그 사람이라는 하나의 실체로 구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즉 적당히 잊는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일반화라고 부르는 능력은 바로 망각에 기반합니다.

일반화라는 것은 여러 대상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질을 추출하여 그 전부를 설명하는 하나의 명제를 추론해 내는 것입니다. 100원짜리 동전, 농구공, 달을 보고 동그라미이라는 일반적 특질을 추출해 내는 것이지요. 만약 각각의 디테일에 너무 집착하며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원이라는 일반적 특성을 추출해 낼 수 없게 됩니다. 아주 극단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뱀에 한 번 물린 적이 있다면 다음번에는 뱀을 보면 도망가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자신을 물었던 뱀과 이번 뱀이 무늬가 다르다고 해서 이번 뱀은 자신을 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안전할까요, 아니면 다리가 없고 몸이 비늘로 덮여 있고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혀를 날름거리는 저런 형태의 동물은 유해할 가능성이 높으니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좋다고 일반화한 추론을 하는 것이 안전할까요? 당연히 후자가 안전할 것이고, 생존 확률을 높여줄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화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적당히 잊는 것, 건강한 망각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참고 문헌 : 기억의 뇌과학(리사 제노바), 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스콧 스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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