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뉘앙스의 실종 | 카피 앤 페이스트의 부작용 | 복붙 | 짧은 컨텐츠의 악영향

RayShines 2023. 7. 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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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앙스 nuance 는 표현, 의견, 감정 등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차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말이나 글에서 미묘한 어조를 느끼며 전반적인 분위기를 알아챕니다.

 

말속에 뼈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의 내용에 대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하는 태도, 분위기, 톤 등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뉘앙스가 있다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단순히 컨텐츠로만은 전할 수 없는 비언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에서 느껴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흐름 같은 것이겠지요.

 

 

 

각각의 키노트 슬라이드를 떼어놓고 보면 불연속적 정보의 연속입니다.

발표 자료를 만들기 위해 키노트나 PPT 슬라이드를 만들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슬라이드 한 장, 한 장은 불연속적인 정보를 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슬라이드 한 장에 담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응축해 가독성과 가시성을 높이려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내용에 대한 설명이 적어지고 불친절하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슬라이드에는 요점을 제시하고 나머지는 말로 설명하여 핵심과 설명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프레젠테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슬라이드 사이를 잘 메워 넣는 것입니다.

하지만 발표를 하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슬라이드와 슬라이드 사이를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불연속적 정보를 담고 있는 두 슬라이드 사이를 청중들이 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물 흐르듯이 넘어가려면 슬라이드를 넘기는 그 순간에 하는 말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만화를 보면 비슷한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화는 불연속적인 정지 화면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컷과 컷 사이에는 빈 공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이 그 사이를 채워 넣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만화는 마치 영화처럼 펼쳐지게 되지요. 발표도 그렇습니다. 슬라이드와 슬라이드 사이의 물리적, 추상적 간극을 잘 메워 넣어야 자연스러운 발표가 됩니다.

 

 

 

자료 중간에 반례가 들어있으면 불연속성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겠죠.

그런데 발표 자료를 만들다 보면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에 배치되는 증거들이 담겨 있는 슬라이드도 제시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슬라이드 사이의 불연속성이 최고조에 이릅니다. 만약 강연자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자료만 받아본 사람이라면 직전 슬라이드와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 담긴 슬라이드가 나오면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흐름이 이해되지 않겠죠. 그러나 강연자가 슬라이드를 넘기며 적절한 설명을 하면 실제로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강의 흐름이 끊긴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뉘앙스가 중요해집니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A이지만 B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B를 제시하지만 결국 이것은 A를 강조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전달되며 강의 전체의 뉘앙스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 자료를 짜깁기하면 자연스레 불연속성이 매우 증가합니다.

만약 발표 자료를 만들 때 다른 사람들이 만든 자료 여러 개를 카피 앤 페이스트하며 편집해서 만든다면 이런 뉘앙스가 사라지기 쉽습니다. 슬라이드의 기본적 디자인, 폰트, 들여 쓰기, 중요 단어를 강조하는 방식 등도 뉘앙스 중 하나입니다. 그것이 중간에 사소하게 달라지면 보는 사람들은 뭔가 불연속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또한 여러 사람이 만든 여러 슬라이드가 가진 각각의 뉘앙스가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으면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폰트와 디자인을 맞추고, 내용을 문장으로 끝내는지, 단어로 끝내는지 등을 통일하고 앞뒤로 계속 슬라이드를 움직여보며 슬라이드 사이를 채워 넣을 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뉘앙스를 만들어야 하죠.

 

 

 

카피 앤 페이스트 속에서 우리는 뉘앙스를 잃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카피 앤 페이스트는 이제 아주 기본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그것들을 참고하는 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창조적인 결과물이 나오는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미리 만들어진 상용구나 템플릿을 그대로 가져다 붙이는 것은 이런 뉘앙스를 완전히 없애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투적인 문장들이 반복되는 보고서나 기록들을 볼 때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료 중 어디가 중요한지 잘 알 수가 없고,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도 더 어렵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비판적인 카피 앤 페이스트를 하는 과정 중에 뉘앙스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간편함을 얻는 대가로 우리는 뉘앙스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짧은 컨텐츠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뉘앙스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긴 글을 읽는 능력을 잃어가는 것, 연관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서로 불연속적인 15초짜리 동영상들을 수십 개씩 보게 되는 것 등도 모두 우리가 전체를 관통하는 어조와 뉘앙스, 그리고 주제를 파악하는 능력을 잃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진득하니 한 가지 주제를 차분히 이야기하는 컨텐츠를 참을성 있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자꾸 잃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고차원적 능력 중 하나가 장기적 조망을 갖고, 지루한 현재를 견뎌내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긴 시간을 꿰뚫는 자신만의 정체성과 주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통 즉각성과 불연속성으로 중무장한 단편적인 컨텐츠의 범람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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