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사회적 시계 Social Clock | 시회적 압력 | 서른넷이 중요한 나이인 이유 | 과제 | 낙오 | 고정관념

RayShines 2023. 8. 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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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몇 살이 되면 뭘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매우 강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닙니다. 서양문화권에서도 사회적 시계 social clock 이라는 개념이 있다고 하네요.

 

가령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스물이 되면 대학을 가서 스물대여섯이 되면 취직을 해서 자리를 잡고, 서른이 되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마흔이 되면 집을 사고, 예순이 되면 자녀들을 출가시킨다는 모종의 명령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압력이 매우 크게 작용해서 해당 시기에 해당 과제를 달성하지 못하면 뒤쳐진 것으로 느껴지고, 심하게는 낙오자로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우리나라의 집산주의(collectivism), 즉 사회 전체를 위해 개인의 자유는 어느 정도 제한되어야 하며 전체에 개인이 맞추는 것이 더 정의롭다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들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서구권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서구권 문화에는 이런 개념이 없을까요. 서양은 시계열 상에서 정해진 마일스톤 milestone 들이 있고 이런 과제를 클리어하지 못해도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문화권일까요? 반드시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서구권에도 사회적 시계 패턴 social clock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대개 몇 살에는 무엇을 하고, 어떤 것을 이룰 것이라는 어느 정도의 미리 결정된 생활 사건의 스케쥴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시계가 단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와 가족이 중심이 되는 시계를 따르는 인원들이 있고, 직업에 초점을 맞춘 시계에 맞춰 사는 인원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어떤 시계도 따르지 않는 그룹도 있습니다.

 

 

 

여성들의 경우 자녀/가족 시계를 따르는 그룹과 직업 시계를 따르는 그룹의 차이는 극명합니다.

자녀/가족 시계를 따르는 이들은 가족들을 배려하고 전체를 생각하는 경향이 더 높습니다. 반면 커리어를 따르는 여성들은 독립성과 자주성이 높고 성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르는 시계가 없는 여성들은 외로움을 느끼며 우울에 빠지기도 합니다.

 

 

 

남성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타임리밋은 서른넷입니다.

남성들의 경우 여성들처럼 시계가 나뉘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 20대에 별다른 목표나 계획 없이 무질서하게 사는 이들도 서른 살 정도가 되면 삶에 질서와 안정을 부여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삶의 여러 가치들의 방향을 배열할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기준점을 설정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기도 하고 가정을 이루기도 하고 아니면 직장에 취직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 연구에서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사회적 압력이 덜하고 개인의 일탈에 대해서 관대하며 개인의 결정과 자유를 높은 가치로 여기는 서구 문화권에서도 서른네 살을 그 임계점으로 봤습니다. 다시 말해서 서른네 살까지 기존의 내키는 대로의 삶에서 탈피해 지루하지만 질서 정연한 삶으로 진입하지 못하면 그 이후에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낮아진다고 본 것입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중후반까지는 뭔가를 시도하고 실수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용인이 됩니다.

기성세대들은 “그땐 그럴 수 있지, 젊어서는 이것저것 해보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며 이들을 위로합니다. 그런데 서른 중반이 되어서도 계속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갑자기 사회는 냉혹해집니다. 지금까지 뭘 했느냐, 남들은 착실히 준비를 할 때 허송세월을 한 것이냐며 가벼운 이력서를 옆으로 밀어내버립니다. 그 사람이 어떤 여정을 거쳐왔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즈음부터는 갑작스레 과정이나 시도 그 자체의 의미는 옅어지고 성과와 결과가 중요해집니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그들을 판단하는 이들이 대부분 기성세대이며 사회에 미리 형성되어 있는 질서에 순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입니다.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은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일탈자라고 보기 쉬우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늦으면 아무런 방법이 없느냐는 말이냐고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기존의 결정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결정을 내리고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이 너무 늦지만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늦었다고 해서 시계를 쳐다보지도 않는 것보다는 늦더라도 시계를 따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시계를 보면서 사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직업을 바꾸는 것,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힘들고 두려운 일입니다. 갑작스럽게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목표와 목적이 있다면 바로 그 효과나 결과나 가시화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계속해나가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계에 맞춰진 세상에 진입조차 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시계를 따르는 것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재능이 있고, 불사를 열정도 있다면 시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빨리 갈 수도 있고, 늦게 꽃을 피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두 가지 정도 잘하는 것은 있지만, 그 재능으로 세상 모든 문제가 해결될 정도로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시계를 따르며 세상의 물결 속에서 흘러갑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체제에 순응한 패배자들일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각자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알고, 자신의 페이스와 템포로 자신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고 이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각자는 위대합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면 늦지 않았다. 넌 네가 원하는 누구라도 될 수 있으니까. 시간제한 같은 건 없고, 멈추고 싶으면 언제든 멈춰도 괜찮아. 변화해도 되고, 지금 모습 그대로 있어도 된다. 규칙은 없어. 
우리는 최선도, 최악도 이루어낼 수 있으니까. 물론 난 네가 최고의 결과를 내길 바라고, 니 심장을 뛰게 만들만한 일을 찾아내길 바란다. 네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껴봤으면 좋겠고, 너와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을 만나길 바란다. 너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만한 삶을 살길 바란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갖길 바란다.”

 

“For what it’s worth: it’s never too late or, in my case, too early to be whoever you want to be. There’s no time limit, stop whenever you want. You can change or stay the same, there are no rules to this thing. We can make the best or the worst of it. I hope you make the best of it. And I hope you see things that startle you. I hope you feel things you never felt before. I hope you meet people with a different point of view. I hope you live a life you’re proud of. If you find that you’re not, I hope you have the courage to start all over again.”

참고 문헌 : 성격, 탁월한 지능의 발견(존 메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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