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내가 화가 나면 모두 부당한 것일까요? | 감정은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 황금률 | 은율 | 감성

RayShines 2023. 8. 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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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법칙이지요. 은율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했을 때 싫은 행동은 나도 남에게 하지 말라는 법칙입니다. 

 

 

 

황금률과 은율의 기본 전제는 어찌 보면 매우 간단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들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들도 싫어한다는 것, 그것입니다. 이것은 각각의 개인은 서로 매우 다르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이라는 존재는 똑같으며, 그 중 누군가가 어떤 행동이 좋다고 하거나 싫다고 한다면 다른 누군가도 그 행동에 대해 같은 판단을 내린다는 추론의 결과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 호불호가 누군가의 호불호이므로,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근거로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누구나 좋아하고, 내가 혐오하는 것은 누구나 혐오한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적 명령이 될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논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옳고, 내가 혐오하는 것은 그르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될 것입니다. “이건 옳지 않아? 왜? 내가 지금 이게 싫으니까!”, “저 사람이 하는 말은 옳아, 누구나 저 사람을 좋아하거든”,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내적 관념, 혹은 감정적 반응을 근거로 중대하고 거대한 것을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옳은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좋아하는 누군가가 하는 말이 다 옳을 수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의견에 한 치의 의심도 없으며, 그 근거로 자신의 감정과 내적 확신을 사용하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소수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보다 더 중요해지고, 때로는 가장 중요해지는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다수결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것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은 여러 차례 입증이 된 것이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이 보편타당한 호불호를 가지고 있다고 봤을 때 자신의 호만 중요하고, 그것이 타인에게 불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회적 규약에서 어긋난 것이고 황금률은커녕 은율조차도 지킬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회적 소수들은 자신들이 소수이고 싶어서 소수인 것은 아니니 당연히 다수에 의해 억압받아서는 안될 것이며, 국가와 정부를 사회의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발생한 계약으로 본다면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런 결정을 내릴 때는 분명 감성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정책을 만들고 세부적인 사황을 조율하며 숫자가 오가는 상황에서는 “내 가슴이 시켰다”든지 “지금 내 느낌이 바로 그 근거”라든지 하면 조금 곤란한 게 아닐까요. 감정은 근거가 되기 어렵습니다.

 

 

 

감정은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감정은 상태이며 시시각각 변화합니다.

매분매초 바뀌는 것이 사람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감정적 결정이 결과를 그르칠 가능성이 높은 것이지요. 매번 바뀌는 기준점을 가지고 사격을 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생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생각은 기록해 둘 수 있고, 서로 논의해 볼 수 있으며,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은 매우 휘발성이 높으며, 각자의 주관적 경험이기 때문에 논의라는 것이 불가능하며, 수정하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그냥 내가 그 상황에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면 거기서 더 이상 논의는 불가능합니다. 아 그랬구나 하며 서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내가 그때 불쾌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 상황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이야기가 다릅니다. 자신이 느낀 불쾌함이라는 일시적인 상태가 사회적 정의가 훼손되는 것과 동의어는 아닙니다. 그 상황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정의롭지 못한 것도 아니고, 감수성이 부족한 것도 아니며, 충분히 공부를 하지 않거나 교육을 받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그 상황에 화가 나는데, 누군가는 화가 나지 않는다, 그뿐입니다. 감정이란 이런 것입니다. “나는 화가 나는데 왜 너는 화가 안 나?”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할 수 없지요. 누군가가 누군가의 화를 인정해 준다면, 누군가는 누군가의 평정심도 인정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화가 나는 쪽들은 화를 내지 않는 쪽의 둔감함을 비난하고, 조용한 쪽은 분노하는 쪽의 민감함을 힐책합니다. 그냥 화가 나네, 아 화가 안 날 수도 있네, 하면서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 왜 화가 나는지, 왜 분노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서로 다룰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화가 난 것이다, 혹은 나는 내가 지금 화를 내는 것을 이런 논리로 정당화하겠다는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이 먼저인지, 생각이 먼저인지는 차치하고 그 두 가지는 서로 너무 밀접하게 붙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동시에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그런 논의를 거치며 거기 붙어 있는 감정은 최대한 희석시키며 아이디어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보다 건강하지 않을까 합니다.

 

황금률을 지키면서 살기는 불가능한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은율이라도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합니다.

 

참고 문헌 : 성격, 탁월한 지능의 발견(존 메이어), 스킨 인 더 게임(나심 탈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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