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영혼은 존재할까요? | 삶과 죽음 | 육체와 정신 | 이원론 Dualism | 창조론 | 몸과 마음

RayShines 2023. 10. 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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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누군가의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우리를 떠나간 그 사람이 영혼은 영원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살고 있고, 멀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여기며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병에 걸리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수명이 다해서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은 죽습니다.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죽음은 개별적인 것이며, 한 인간이 죽음으로써 그 인간의 삶은 거기서 종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식으로 건조하게 죽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망자가 삶의 죽음 사이의 경계를 건너긴 했으나 저쪽, 저승, 피안, 천국, 내세 등 여러 가지 용어로 일컬어지는 곳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 경계를 넘어 이 세상으로 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살펴보고, 보호해 준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죽음의 차가운 속성을 보다 따뜻하게 만들어서 부둥켜안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이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영원한 반려의 개념으로 승화시킵니다.

 

 

 

이원론은 우리가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립하려면 우리가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것을 이원론 Dualism 이라고 합니다. 과거 수천 년 간 인간이 가진 인간에 대한 인식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원론을 주장한 이로는 데카르트가 가장 유명합니다. 데카르트는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한창이던 16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유럽 최대의 종교 전쟁이었던 30년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냈습니다. 30년 전쟁은 그가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시작되어 그가 죽기 2년 전인 1648년 끝났습니다. 30년 전쟁으로 지금 독일의 영토 대부분이 초토화되었고, 인구는 3분의 1로 줄었을 정도로 그 피해는 컸습니다. 그런데 30년 전쟁의 강화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의 요지는 “모든 것을 30년 전으로 되돌린다”는 것이었을 정도로 무의미한 전쟁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신교와 구교 사이의 종교 전쟁이었으나 실제로는 용병들 사이의 참혹한 학살극에 가까웠던 30년 전쟁을 지켜보며 데카르트는 인간과 종교에 대한 너무나도 큰 회의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원칙을 자신의 철학의 기반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세 종교의 편협함과 모호함에서 과학을 완전히 분리하고 싶었는지 정신과 육체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성찰록에서 “신적인 힘에 의해 마음은 신체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신체는 마음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이원론을 주장했습니다.

 

 

 

물론 데카르트 이전에도 이원론은 있어왔습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이원론은 늘 있어왔습니다. 절대적 존재가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음을 의심해 볼 수조차 없던 시절에는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의 지식 역시 신이 인간에게 내린 것 중 하나였으며, 그 지식은 영혼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신이 준 영혼과 물리적인 인간의 신체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원론적 생각은 데카르트 이전에도 늘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원전 4세기에 플라톤은 인간을 신체, 마음, 영혼으로 나누었으며, 이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인 성부, 성자, 성령으로 변화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원론의 기저에는 창조론적 교리가 깔려 있습니다.

 

 

 

창조론과 이원론은 우리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진화한 존재라고 볼 수 있게 된 것은 역시 찰스 다윈의 업적입니다. 1859년 다윈이 출간한 종의 기원은 그때까지 인류사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중심 명제를 뒤흔드는 도발이었으며, 종교적으로 강력하게 경도된 세상의 사람들이 진화론을 달가워할 리가 없었습니다. 진화론은 받아들여지는 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아직도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의 긴장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더 직관적인 창조론과 그 지적 자손인 이원론은 아직도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죽은 이의 영혼이 우리를 굽어살피고 있다는 자기 위로 속에도 그것이 스며들어있듯이 말입니다.

 

 

 

과학적 사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과학과 숫자로 이야기하는 것은 가끔 너무 숨이 막히기도 합니다. 인간이 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정신과 감정, 생각들은 전기화학적 신호의 결과라는 생각은 우리의 삶의 의미를 너무 편평하게 압축시켜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이 비록 그 육신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혼은 우리 곁에 남아 있고, 또 우리가 그 사람과 나누었던 추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으며, 정말 우리가 어려운 순간에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조금 더 따뜻하게 하고, 힘든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되어줍니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시대라도 하더라도 말입니다.

 

참고 문헌 : 인간의 위대한 질문(배철현), 우리 본성의 착한 천사(스티븐 핑커),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존 카치오포, 윌리엄 패트릭), 통섭(에드워드 윌슨), 오래된 기억들의 방(베로니카 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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