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아이들이 이별 앞에 쿨한 이유 | 아이들이 헤어질 때 무심한 이유 | 중요한 타인 Significant Others

RayShines 2023. 9. 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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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떠나게 되어 오랫동안 못 보는 아이들과 헤어질 때 어른들은 그 이별에 애달파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고 쿨하게 돌아서는 경우를 더러 봅니다. 

 
 
 

아이들은 뭔가의 유한성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른들은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불규칙성,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간 삶의 유한함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기회가 우리가 원할 때마다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때는 너무나 사랑해서 이 사람이 없으면 곧 죽을 것 같았던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서도 그 상처는 무작정 흐르는 시간, 혹은 다른 어떤 것인가로 덮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몇 끼 거르고 나면 배고픔이라는 생리적 욕구에 굴복했던 나 자신을 바라보며 처연하기도, 한편으로는 한심스럽기도 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소소한 일상의 기쁨 앞에서 조용히 번지는 미소에 내가 이렇게 웃어도 될까 하며 이질감을 느꼈던 적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무엇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이들은 유한과 무한, 영원과 찰나, 탄생과 소멸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아주 어릴 때는 시간의 연속성, 그리고 내 시간과 타인의 시간 사이의 불연속성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여기서 이것을 하고 있는 동안, 아빠 엄마는 다른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했던 것에 대해서 아빠 엄마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또한 물질의 연속성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파 밑으로 굴러들어가 반대편으로 나온 공이 들어갔던 공과 같은 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하고, 동그란 물벼에 들어있는 물을 네모진 물병으로 옮기면 같은 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현재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미래에 대한 조망은 과거에 대한 기억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미래의 기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생각할 때 가장 흔히 사용하는 재료가 바로 자신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할 때 과거의 기억은 회상되기도, 편집되기도, 조작되기도, 왜곡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래를 바라볼 때 아주 자연스럽게 과거를 회상하던 것과 같은 프로세스가 뇌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사건들에 대한 기억들 - 일화기억 - 과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에 대한 기억들 - 서술기억 - 은 과거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줬을 것입니다. 작년 이 맘 때, 여기에 빨간색 달콤한 과일이 열렸었으니 과일을 채집할 수 있고, 그 과일을 먹기 위해 초식동물들이 이 부근에 있었으니 빨리 먹지 않으면 과일을 놓치겠지만 잘 계획을 하면 사냥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그 초식동물을 노리는 육식동물도 있을지 모르므로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개체가 훨씬 더 생존에 유리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를 생각하면서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주식을 할 때 후향적 기록인 차트를 보고 선향적 생각을 하는 것도 바로 그런 프로세스겠죠. 그래서 우리가 그런 말을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요. 나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의 양이 적으면 아무래도 세상에 대한 조망도 따라서 협소해질 수 있겠죠.
 
 
 

아이들은 시간의 유한성에 대해서 거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음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미래를 걱정하면서 현재에 몰입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발달과 성장에 방해가 될 가능성도 꽤 높습니다. 당장 먹고 읽고 놀면서 물리적, 정신적으로 커나가야 할 아이들이 음식물을 저장하고, 즐거움을 지연하는 것은 진화적으로도 그다지 적응적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이일 때는 당면한 과제, 즉 생존과 성장, 발달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마음속에 정말 중요한 누군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카나 친지들의 아이들이 나와의 이별을 그다지 무거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마음 아프게도 그 아이들에게 내가 그다지 중요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주 원론적으로 보면 아이들이 태어난 직후에 아이들에게는 자기 자신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매우 자기 폐쇄적인 단계에 머무르는 시기가 있는 것이지요. 그 시기가 지난 뒤 처음으로 형성되는 관계가 주요 양육자, 대부분의 경우 엄마와의 2자 관계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자라면 아빠가 관계 속으로 들어오며 3자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 3자 관계가 당분간은 아이들의 세계 전체를 구성합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원판이 되며, 이 아이들이 성장한 이후의 모든 관계들은 이 원판의 복사본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할 정도로 부모와의 관계는 중요하며 부모는 아이에게 매우 중요한 타인(significant others)입니다. 따라서 어떤 아이들에게 주요 양육자 한두 명이 가지는 의미는 극단적으로 크며, 그 외의 인물들들의 가치는 매우 희박합니다. 그리고 그게 적응적일 것입니다. 소수의 중요한 이들과 깊고 유의미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 여러 명과 피상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보다 감정적 교류 차원에서의 장점도 많을 뿐만 아니라 자기 생존의 가능성도 높여줄 것입니다. 피상적인 관계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투자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요.
 
아이들은 이별 앞에 무심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이 매우 실질적인 것들인 동시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대상의 개수가 소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배우지 못했거나,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들인 기회의 상실, 생명의 유한성 등이 아니라 실제로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과 맛보았던 사탕입니다. 그리고 기억의 창고에 아주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가끔 보는 이모나 삼촌이 아니라 그들의 애착의 근간을 이루고, 그들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소수 정예의 누군가들입니다. 그들이 이별 앞에 냉담해 보이는 것은 무심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과 유관한 것들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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