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할머니는 빅데이터였다 | 폐경이 발생한 이유 | 할머니 가설 Grandmother Hypothesis | 폐경이 생긴 진화적 이유 | 과학적 설명

RayShines 2023. 12. 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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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가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할머니들이 손자와 손녀를 돌보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후대에 전수했다는 가설입니다. 

 

 

 

인간의 진화 과정 중 첫 번째 생존방식은 수렵과 채집이었습니다.

수렵채집민들은 정주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따먹을 과일이 없고, 손쉽게 사냥할 수 있는 짐승들이 서식지를 옮기고 나면 우리의 조상들도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이사를 간다는 것은 생활환경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존에 쌓아왔던 지식이 무용해지기 쉽습니다. 같은 조건에서 반복적인 경험을 쌓아나가며 지식을 축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10000년가량 전 농경이 시작되며 인간은 정주하게 되었습니다.

농경문화에서는 삶의 터전 자체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습니다. 열심히 경작해 둔 땅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한 곳에 머물러 살면 자연스럽게 환경을 어느 정도 자신들에게 맞게 수정하기도 하고, 개선할 수 없는 환경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환경에 적응합니다. 그리고 비교적 일과적인 환경 속에서 반복적인 학습과 경험을 통해 지식이 축적됐을 것입니다.

 

인류가 처음으로 문자를 발명한 것은 대략 기원전 32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수메르의 설형문자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문자는 자원의 보유량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명됐으며, 평범한 사람들에 널리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몰랐죠. 따라서 쌓인 지식을 글로 남겨 후대로 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구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여기서 할머니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들을 돌보기보다는 밖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할머니는 젊은 부모가 열심히 경작물을 돌보고 있는 동안에 어린아이들을 대신 양육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자녀들에게 아이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지식들을 전수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에 비해 노년층의 비율이 다섯 배 가량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호모 사피엔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장신구, 벽화, 장례 문화가 시작됐다고 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노년층이 살면서 쌓아온 지식이 인구 팽창과 문화적 발전에 기여했다는 뜻입니다. 할머니는 그 시절의 빅데이터였습니다. 각 마을마다 있는 오래된 도서관이었습니다. 말로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느 각도에서 접근해야 하는지를 직관적으로 알기도 했을지 모릅니다. 문제에 다가가는 데이터 포인트를 체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여성은 영장류 중 유일하게 폐경이 발생하는 종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 폐경이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합니다. 인간은 거의 유일하게 영장류 중 가임기보다 수명이 월등히 긴 동물입니다. 침팬지 같은 경우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 새끼를 낳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50대 정도면 폐경이 오고, 사실 그 훨씬 이전부터 자손을 낳지 않습니다. 폐경이라는 메커니즘 덕분에 성인 여성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연령보다 훨씬 더 오래 살며 자신의 자녀들의 자녀들을 돌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서 자녀들을 더 많이 낳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실제로 어머니가 곁에 있는 딸이 자녀 양육에서 더 성공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많습니다.

 

농경 생활을 하며 정주 문화가 시작되고, 폐경이 발생하며 늘 집안을 돌보고 지키며 생활의 지혜를 널리 퍼뜨릴 수 있는 여성들의 숫자가 충분히 확보되자 호모 사피엔스의 인구는 크게 늘고, 그 숫자가 늘며 문화적인 발전도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은 기성세대들의 사고방식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가능해지겠지요. 하지만 경험을 존중하는 문화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특히 매우 변수가 많아서 데이터를 모두 검토하기 어려운 복잡계에서는 직관이 더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축적된 경험과 새로운 혁신 사이의 조화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참고 문헌 : 스킨 인 더 게임(나심 탈레브), 강의(신영복), 차이에 관한 생각(프란스 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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