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캡그라스 증후군 Capgras Syndrome |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 카그라스 | 캡그래스 | 캅그라스 | 무엇 경로 | 방추형 이랑 fusiform gyrus

RayShines 2023. 12. 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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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그래스 증후군 Capgras syndrome 이라 불리는 증상이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과 매우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사람들이 아니며,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강하게 믿습니다.

 

 

 

캡그라스 증후군을 처음 보고한 것은 1923년 프랑스 의사 조제프 카프그라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질환명이기 때문에 카프그라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지만, 영어권 사전들을 찾아보면 캡그래스라고 발음을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캅그라스, 캡그라스, 캡그래스 등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카프그라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53세 여성 마담 M의 사례에 대한 보고를 했고, 그 이후 유사한 사례가 많이 보고되며 이제는 주요한 문헌에도 실리는 병명이 됐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들이 시각적 자극에 대해서만 이런 증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전화 상으로 통화를 하면 이들은 수화기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부모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캡그래스 증후군은 두부 외상에 의해 발생하기도 합니다.

교통사고가 일어나며 유리창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힌 후 3주 간 의식불명에 있던 한 청년은 그 이후로 자신의 부모가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청년 역시 부모와 전화를 할 때는 부모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면전에서는 부모가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습니다. 그 청년의 아버지가 가짜 아버지를 중국으로 보내버렸다고 거짓말을 하자 그 청년은 잠깐 그 말을 믿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1주일 뒤 그는 가짜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다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부모로서는 정말 마음이 아픈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증상에 대한 설명 중 하나는 시각 자극과 감정 반응 사이의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캡그래스 증후군에 대한 설명 중 한 가지는 시각적 자극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적 반응 사이의 관계가 단절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우리가 기대하는 감정적 반응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야 합니다. 가슴이 따듯해지는 느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안전하다는 느낌, 그리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내가 저 사람을 믿고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 등 감정적인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뇌로 들어온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그와 같은 감정적 해석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상에 대한 낯설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 중 한 가지는 저 사람이 정말 사랑하는 나의 부모라면 나에게서 이렇게까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다, 따라서 저 사람은 나의 부모가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 측두엽의 일부인 방추형 이랑 fusiform gyrus 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위는 우리가 얼굴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처리하거나 생각할수록 그 활성도가 더 증가합니다. 그래서 이 부위를 특별히 방추상 얼굴 영역 fusiform face area 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합니다. 눈으로 들어가 시신경을 지나며 처리된 이미지는 이 부위에 도달한 뒤 우리의 감정 경험에 크게 관여하는 편도체와 전전두엽 피질로 전달됩니다. 여기서 감정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시각 자극이 시각피질을 거쳐 측두엽에까지 도달하는 이 경로는 무엇 경로 what pathway 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이 경로에 문제가 생기면 대상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감정적 반응도 제대로 일어나지 않겠죠. 그러나 정말 뇌에서 안면이식에 특화된 뉴런이나 부위가 있는지, 더 나아가서 뇌의 특정 영역이 특정한 기능에 완전히 전문화되어 있는지, 다시 말해 뇌가 모듈로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의 중입니다.

 

 

 

캡그래스 환자가 아닌 사람들도 이 증상을 경험합니다.

뇌과학과는 별개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캡그래스 환자가 아닌 우리들도 누구나 이런 증상을 경험해 본다는 것입니다. 바로 한때는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이 식고 나면 그 사람이 마치 처음 만난 그 사람이 아닌 낯선 사람으로 느껴지는 경험을 해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위의 사례에 나왔던 마담 M 역시도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들 - 실제로는 그녀의 남편 - 을 만날 때마다 늘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환자가 아니더라도 현실의 아내들이 남편에 대해서 많이들 하는 말이지요. “ 우리 남편이 낯설게 느껴져요, 처음 연애할 때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사랑은 변합니다.

처음의 열정은 금세 식어버리지요. 헬렌 피셔라는 연구자는 초기의 열정적 사랑은 1년, 길어야 1년 반 정도밖에 지속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연인이 2주년 기념일을 맞이하기 전에 헤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관계의 양상과 질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연애를 시작할 때의 그 설렘과 두근거림을 되찾고 싶어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 그리고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그런 운명적인 사랑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도 연애를 계속하고 있었더라면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식었을지도 모릅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프란체스카가 킨케이드를 따라나섰다가 크게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사랑은 변합니다. <봄날은 간다>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대사는 지속되지 않는 사랑에 대한 원망입니다.

 

 

 

내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은 나의 바람을 투영한 가상의 인물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캡그래스 증후군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더 이상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아니니 돌려내라는 자조 섞인 푸념을 합니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가 처음 사랑에 빠진 대상이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인지 말입니다. 어쩌면 내가 처음에 사랑에 빠졌을 때의 그 사람은 내가 바라는 속성들을 모두 골라서 장식한 가상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원래 내가 바라던 모습이 그렇게 크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난 그 사람에게서 내가 바라는 모습만을 크게 키워 과장하고, 다른 단점들은 모두 무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서는 시간이 지나고 사랑이 사그라들며 이성적 시각으로 대상을 보게 되자 그 사람에게 내가 원하던 모습이 없었고, 캡그래스 환자들이 결론을 내리듯 그 사람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참고 문헌 : 감정의 재발견(지오반니 프라제토), 뇌로부터의 자유(마이클 가자니가), 뇌는 작아지고 싶어 한다(브루스 후드), 생각은 어떻게 행동이 되는가(데이빗 바드르), 뇌 과학의 모든 역사(매튜 코브), 두뇌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도파민형 인간(대니얼 Z. 리버만, 마이클 E. 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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