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쾌락과 고통 | 행복과 불행 | 중립적 기분은 과연 존재할까요?

RayShines 2023. 12. 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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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반대말은 고통일까요? 왜 둘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진 한 가지 물건처럼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쾌락이라는 것은 어찌하여 정반대의 개념으로 여겨지는 고통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가… 둘 중 하나를 좇는 자는 흔히 반대의 것을 얻게 된다. 이들은 둘이되, 하나의 머리 또는 줄기에서 함께 자란다.” 소크라테스가 아마 지금의 신경과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처럼 뇌의 작동 방식이나 신경전달물질이나 fMRI 같은 것에 대해서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인들은 도구 없이도 인간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통이 없는 순간과 쾌락이 동의어는 아닙니다. 

쾌락이 없는 순간이라고 해서 그 즉시 고통스러운 것 역시 아닙니다. 둘은 일견 무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시소의 양 끝에 올라가 있다고 상상하면 우리가 쾌와 불쾌를 느끼는 데에 대해 이해가 되는 면이 많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아마도 뇌 내부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전기화학 신호들의 총체적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6대 감정으로 분류되는 놀라움, 공포, 역겨움, 분노, 슬픔, 행복은 아마도 우리 몸의 물질들이 이리 저리로 오가고 서로 부딪히고 섞이며 만들어내는 연금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화학반응은 매우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A가 B로 변화하는 과정에는 A가 B로 변화하는 과정과 B가 A로 변화하는 과정이 동시에 일어나지만 A가 B로 변화하는 과정의 속도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관찰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리고 같은 조건 내에 존재하는 A와 B의 양의 비율이 일정하게 유지되기 시작하면, 가령 예를 들어 그 비율이 1 대 100,000이라면 이 과정은 일방적으로 A가 B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측정될 것입니다. 하지만 B가 A로 변화하는 과정도 전체적 관점에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를 동적 평형이라고 부릅니다. 표면적으로는 멈춰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쾌락과 고통은 아마도 시소처럼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이 분명 우리 체내에서 일어나는 화학 작용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쾌락과 고통이라는 두 가지 구성 요소 사이에도 끊임없는 양방향으로의 역동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가정을 해본다면 우리의 감정에 대해서 이해가 되는 면이 많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쾌락과 고통이 시소의 양 끝에 올라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둘 사이의 비율에 따라 시소가 끊임없이 움직이기도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쾌락은 고통 쪽으로, 고통은 쾌락 쪽으로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지만 흘러 나가고 흘러 들어오는 속도가 거의 같다면 시소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평형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평소의 기분을 유지하는 상태를 평점심이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선조들은 이 관계에 대해서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겠죠. 다시 말해 우리에게 쾌락과 고통이라는 개념, 혹은 상태, 혹은 감정은 존재하지만 0이라는 상태나 감정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과 고통의 균형에 따라 생길 수도, 없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이 시소는 매우 쉽게, 그리고 매우 빠르게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집니다.

평형을 유지하고 있던 시소의 주변 조건이 살짝 변한다고 해보겠습니다. 금요일 오후 5시경입니다. 1시간만 지나면 즐거운 주말이 됩니다. 오늘은 친구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술을 한 잔 하기로 한 날이고, 내일은 그동안 보고 싶었지만 일부러 아껴둔 드라마를 보며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을 무계획적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은 상태입니다. 쾌락에 가까운 상태이죠. 그런데 갑자기 직장 상사가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으니 급하게 준비를 좀 해야겠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 순간 균형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우리 몸의 신경전달물질들이 고통 쪽으로 와르르 흘러 들어가며 시소를 강하게 누릅니다. 1분 전까지만 해도 날아갈듯하던 기분이 갑자기 땅으로 푹 꺼지며 뭐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분노와 짜증이 치밀어 올라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친구들에게 오늘 약속에는 못 나가겠다는 카톡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상사가 다시 와서 프레젠테이션이 취소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 고통의 발생에 관여하던 신경전달물질은 싸그리 회수되고 쾌락을 가져다주는 물질들이 뇌에 쏟아집니다. 시소는 당연히 쾌락 쪽으로 강하게 기울어집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분은 극과 극을 왔다 갔다 합니다.

 

 

시소의 평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마도 평소에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은 이 시소의 움직임이 그렇게 크지 않은 사람일지 모릅니다. 시소 자체가 매우 길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쾌락과 고통의 자리에 올려지는 물질들의 무게가 조금 변해도 시소의 움직임이 그다지 크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기분이 나쁜 쪽으로 변화하려고 할 때 적극적으로 나쁜 기분을 가져오는 물질을 치우려는 노력을 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감정의 기복이 매우 크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쾌락과 고통의 시소가 매우 짧아서 양측의 무게가 조금만 변해도 한쪽으로 쿵하고 기울어져버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정적 기분이 들려고 할 때 이것을 적극적으로 청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거나, 혹은 그것을 치우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나 큰 노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죠. 

 

 

 

기분의 발생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시소가 평형을 찾을 수 있는 각자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안정적인 기분을 유지하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즐겁게 웃고 떠들다가도 사소한 사건 하나로 너무나도 우울하게 느껴지는 일을 우리는 참 많이 겪습니다. 만약 정말 우리에게 중립적 기분이라 것은 없고 이것이 쾌락과 고통의 변주곡에 따라 수동적으로 형성되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렇게 절망적인 것일까요. 아마 그렇진 않을 것 같습니다. 화학적 작용이 개시되는 것을 우리의 의지로 막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시소가 다시 균형을 찾도록 하는 적극적 노력을 해볼 수는 있습니다. 기분을 좋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중립에 가까이 가도록 하는 것부터 시작해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심호흡을 하고, 햇빛을 보며 걷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 같은 사소한 활동들로 우리는 시소의 고통 쪽을 짓누르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치워야 합니다. 계속 시소에 짓눌려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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