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이별 후 느껴지는 슬픔도 치료를 받아야 할까요 | 사별 애도 슬픔 비탄 | 정상 애도 반응 Bereavement

RayShines 2023. 12. 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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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느끼는 슬픔은 치료의 대상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은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보낸 시간과 공간들, 그리고 함께 나눈 추억들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깊고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점유하고 있던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느낍니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추억을 생각하면 과거의 기억들이 빨려 나오며 마치 몸이 아픈 것만 같은 신체적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숨을 쉬기 어렵기도 하고, 가슴이 뻐근하기도 하고, 몸살이 걸린 것처럼 온몸이 아프기도 합니다. 사별은 분명 감정적인 사건이지만, 우리의 육체에 물리적 충격을 주기도 합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누군가와의 재회를 평생 기다린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막막한 일입니다. 초점을 잃고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정신이 드는 경험을 누구나 합니다.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모습을 찾아 해메이다 현실로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그 허망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나갈 때 우리의 삶에 큰 의미를 주는 것 중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삶에 의미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희생과 인내를 할 수 있고, 자칫 방만해질지도 모르는 나의 삶이 잘 정돈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예기치 않게 그런 중요한 사람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삶은 의미와 나침반이 사라진 것과 다름없습니다. 의미가 없으니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없고, 방향을 잃었으니 지금의 삶이 과연 옳은 곳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별 이후에 느껴지는 거대한 혼돈은 여기서 옵니다. 의미와 방향이 모두 사라지고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도 모르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은 결국 많은 것을 해결합니다. 시간은 무자비하기도 하지만 매우 관대하기도 합니다. 시간은 슬픔을 무디게 합니다.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빠져나간 뒤 도저히 채워질 것 같지 않았던 깊고 어두운 동굴 같았던 그 공간을 메워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나갈 수가 있습니다. 마음속 깊이에서는 다시는 그 사람이 있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배가 고파져서 맛있는 음식이 생각나기도 하고, 가끔 웃기도 하고, 예전처럼 친구들을 만나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해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있던 때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지만 이제는 불완전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상실이겠지요.

 

 

 

이별로 인한 고통을 치료의 대상으로 봐야 할까요.

누군가와의 이별 때문에 너무나 슬퍼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가 너무나인지는 알 수 없긴 하겠습니다만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너무 힘들 정도로 깊은 고통을 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에 다니며 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들고 실제로 그런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면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하겠죠. 그것이 아니라도 하더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전문가와 상의를 해보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사별로 인한 슬픔이나, 이별로 인한 비애가 과연 진단 가능한 정신질환인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2013년까지 슬픔은 그냥 슬픔이었습니다. 병이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 정신과 의사들이 진단을 위해 사용하는 매뉴얼인 DS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DSM의 4판의 개정판인 DSM-IV-TR은 2000년에 출간되었습니다. DSM-IV에서는 사별 bereavement 은 별도의 장애로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사별로 인한 애도 반응이 2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는 이상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느끼는 슬픔을 우울삽화 등의 정신장애로 진단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슬픔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봤던 것이겠지요. 2개월이라는 기간이 조금 짧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문화권마다 애도의 기간은 다를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습니다. 과거의 우리나라처럼 3년상을 하는 것을 DSM 편집자들이 봤다면 질병으로 규정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2013년 DSM 5판이 나올 때까지 슬픔은 그냥 슬픔이었습니다.

 

 

 

2013년 이후에는 사별 이후의 슬픔을 주요우울장애로 진단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2013년에 발간된 DSM-5에서는 사별로 인한 깊은 비탄에 빠진 이들에 대해 주요우울장애 진단이 가능해졌습니다. 사별을 경험한 이들이 보이는 증상 중 많은 것들이 주요우울삽화의 진단 기준에 부합하며, 그들이 그런 증상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동시에 적절하다고 볼 수 있지만 애도 반응에 주요우울삽화가 병존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4판에서는 2개월 이상의 기간 동안 슬픔을 보이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하지 않았지만, 5판에 들어서는 주요우울삽화의 기간 기준인 2주를 만족하면 슬픔을 질병으로 진단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DSM-5에서는 지속적 애도 장애(Prolonged Grief Disorder)라는 새로운 진단이 고안되기도 했습니다. 지속적 애도 장애는 사별 후 12개월 넘게 애도 반응을 보이는 경우에 그 진단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슬퍼해야 병적인 것이고, 얼마나 짧게 슬퍼해야 정상적인 것일까요.

일반적인 경우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2주 만에 잊혀지지 않습니다. 2개월이라는 기준도 인위적입니다. 2개월 넘게 깊은 상실감을 느꼈지만 극복하고 잘 지내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랜 기간 슬퍼했다고 해서 상실 전에 보였던 기능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습니다. DSM-IV의 편집을 주도했던 정신과 의사 앨런 프랜시스는 아마도 이것을 이해했었는지 비애, 비탄, 애도와 관련된 새로운 진단을 도입하지 말라고 강조했었다고 합니다. 정신장애 진단에는 증상의 지속 기간이 그 기준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정상적인 애도 반응과 치료가 필요한 비애를 구분하는 시간적인 구분선이 그어진다면 아마도 거짓 양성(false positive)의 비율이 엄청나게 증가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단 기준 상의 기간보다 더 긴 슬픔을 보여 진단을 내렸는데 사실은 치료 없이도 잘 극복하는 사례, 즉 병이라고 여겼지만 병이 아닌 경우가 많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짜 양성 - 여기서 양성은 병에 걸렸음을 의미하는 양성입니다 - 이라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상실한 이들에게 극복할 시간을 줍니다.

문화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대부분의 문화에 상실을 겪은 이들에게 상실을 극복할 시간을 줍니다. 의례를 통해 사람들에게 상실에 대해서 알리고, 같이 감정을 공유하며 상실을 위로해 줍니다. 그리고 상실한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는다든지, 아니면 검은 리본이나 핀을 함으로써 주변인들에게 상실을 알리고, 그 표지를 본 이들은 적극적인 조의를 표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향한 언행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사별을 겪은 이들이 슬픔을 딛고 일어설 시간을 줍니다. 전통적인 문화에서 슬픔, 애도, 비탄은 병으로 비춰지지 않았으며 삶에서 당연히 겪어야 할 정상적인 과정 중 하나였습니다. 슬픔을 통해 우리는 사회로부터는 조금 철수하더라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고, 납득하고, 슬픔의 원인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아왔습니다. 오래 걸리더라도 애도가 가능한 문화 속에서는 억지로 슬프지 않은 척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슬픔은 우리가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슬픔이 있어야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슬픔이 없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사소한 통증을 모두 진통제로로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니며,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불안이 느껴질 때마다 항불안제를 삼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과 슬픔은 인생에 있어서 당연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슬퍼하지 않고는 슬픔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슬픔을 견디고 싶지 않아서 모든 슬픔을 우울증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대해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고통과 슬픔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합니다. 슬픔에 빠져 있거나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의 아픔이 가시길 바랍니다. 

 

참고 문헌 : 감정은 패턴이다(랜디 타란), 감정의 재발견(조반니 프라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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