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인간은 합리화와 이분법적 사고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 믿음의 합리화

RayShines 2024. 2. 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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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의 믿음을 합리화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합리화는 자신은 항상 옳고 상대는 항상 그르다는 믿음을 강화시키고, 이로 인해 세상에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믿음이 양립하여 유지됩니다. 

 

 

 

세상은 참 신기한 곳입니다. 두 가지 서로 완전히 모순되어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믿음들이 공존하니까요.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생각과 인간은 진화했다는 생각,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그렇지 않다는 생각, 나의 신만이 유일하다는 생각을 믿는 여러 가지 종교들 등이 그렇습니다. 만약 유일신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여러 명의 유일신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 테지만 유일신을 믿는 여러 종교들은 비교적 사이좋게 세상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진영에서도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주장들이 어지럽게 서로 공방을 벌입니다. 증세를 해야 한다, 감세를 해야 한다, 복지를 늘려야 한다, 낙수효과를 노려야 한다, 자유가 더 중요하다, 평등이 더 중요하다, 이 모든 것들이 서로 배치되는 주장들입니다.

 

 

 

믿음은 정체성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인간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정체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방식이 정해지고, 세상을 보는 방식에 따라 행동 지침이 정해지고, 행동 지침에 따라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결과를 손에 받아 드느냐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믿음이 흔들리면 내가 서 있는 자리 자체가 존립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고,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한 번 믿기로 결정한 것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논리적 전개를 통해 믿음을 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라든가, 미지의 것과의 조우, 혹은 각성의 계기 등은 때로는 초현실적이고도 우화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어떤 작은 계기로 사람이 송두리째 바뀌는 그런 일들 말입니다.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 한 인간의 그런 극적 변화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겠으나, 인간이 어떤 것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이성적인 판단은 아닙니다. 대차대조표를 그리고, 증거를 꼼꼼히 검토한 뒤에 하는 행동인 경우보다 주변인들의 행동, 주변인들의 의견, 우연한 계기, 양육 분위기, 부모의 언행 등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지요. 부모가 독실한 신자인 경우 아이도 모태신앙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고, 부모가 자유주의자이면 자녀도 그런 경우가 많으며, 아버지가 좋아하는 야구팀을 아들이 좋아하는 경우도 매우 흔합니다. 뭔가 선택을 한다기보다 주어진 것을 믿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나만 옳다는 생각은 상대가 틀려야만 성립합니다.

자신이 믿는 것만을 믿으면 큰 문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두 가지 배치되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옳으면 상대는 틀려야만 내가 성립하는 두 가지 명제가 있다면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 집단의 정체성, 국가의 정체성,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나는 항상 무조건 옳고, 상대는 항상 무조건 틀리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설령 상대방이 옳은 구석이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사소한 인정이 미끄러운 비탈길 효과를 내며 상대방의 전체를 인정하는 지경에 이를 것을 우려해서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옳다고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두 개로 나누고, 사람들은 거대한 흑백논리에 빠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참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입니다.

자유와 평등은 둘 다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지만 쉽사리 양립하기는 어려운 가치입니다. 자유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자유로운 경쟁을 옹호할 수밖에 없고, 과정이나 경로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결과의 차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승자독식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세상의 작동 원리에 가깝습니다. 반면 평등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은 누구나 평등한 권리와 자격을 누리며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놓인 조건에 따라 좋은 결과를 낼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부당하므로 모든 인간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고, 결과가 나쁘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며,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결과 역시 최대한 평등하게 조종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결과를 균질하게 조종할 수 없다면 운이 없는 이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맞는 이야기도 있고 틀린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좇아야 하는 가치라고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지만, 이 둘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며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적 담론은 결국 자유냐, 평등이냐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유에 힘을 실어주면 평등이라는 가치는 훼손됩니다. 평등 쪽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개인의 자유는 침해받습니다. 적당히 하면 되겠지만, 그 적당히 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분법적 사고의 피해는 누가 보게 될까요.

유연한 사고를 하는 이들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내재적 믿음과 자신의 믿음을 절대 수정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는 비타협적인 태도, 다른 것에 대한 불관용을 취하는 이들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절대 불가능하죠. 그런 이들은 비타협, 불관용이 그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절대 물러서지 않는 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가치는 단호한 결의를 갖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믿음에 대해 회의해 볼 여지조차 없는 믿음의 체계가 세상에 큰 균열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와중에 유연하고, 양보할 용의가 있는 온건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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