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곁에 있는 이들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를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불행해집니다.
SNS와 인터넷을 통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인적 관계의 외연은 무한대로 넓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 그만큼 충족되고 풍요로워졌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아무리 SNS로 많은 사람을 온라인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해도 실제로 우리가 현실에서 물리적으로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숫자는 매우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SNS가 개인들 사이의 물리적 경계를 허물었고 한국에서 미국에 있는 이성 친구를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우리의 삶 중 반드시 오프라인에서 이뤄져야 할 것들은 아직도 분명히 존재하며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가 아주 내밀한 관계를 시작할 때 그것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살고 어떤 직업을 갖고 있냐 등과 같이 우리의 생활 반경이라는 매우 물리적인 요소들을 결정짓는 것들입니다.
과거에는 비교적 소규모 공동체들이 지금보다는 타이트했던 것 같습니다.
골목이 있던 시절에는 동네 친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부모 세대들을 보면 동네 사람들끼리 같이 모여서 주전부리를 나누기도 하고 계를 하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친구가 되면 성인기가 될 때까지 교우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고요. 그런데 갈수록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파트가 가장 주요한 생활 방식이 되어감에 따라, 그리고 아파트 말고 다른 형태의 거주시설을 택하는 것은 자산 증식 측면에서 매우 어리석은 짓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됨에 따라, 그리고 첫 번째 집을 아파트 외에 빌라 같은 것을 택하면 청약에서 대단한 불이익을 받게 되는 일종의 전과처럼 기록됨에 따라 이제 누구나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게 됐습니다. 아파트에는 커뮤니티 시설이라는 게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쉽게 섞일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부동산의 가격이 급등함에 따라서 한 곳에서 정주하는 것은 특권이 됐습니다. 전셋값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이 됐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공동체를 형성하기 어려운 거주 환경에 사회 경제적 환경까지 겹치면서 이제는 사람들에 둘러 싸여 살면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관계를 찾습니다.
그리고 관계로부터 충족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들이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고, 관심을 받고 싶고, 칭찬을 받고 싶고, 위로를 받고 싶고,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그저 타인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자체를 원하기도 합니다. 소규모 공동체들이 비교적 원활하고 단단하게 형성된 시기였다면 다양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욕구를 자연스럽게 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위로를 받고 싶을 때는 A에게, 쓴소리가 필요할 땐 B에게, 그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는 C에게 연락을 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ABC라는 옵션을 갖추고 있지 못한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개인이 가진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관계는 협소해지고 축소됐으나 개인의 욕구는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커졌다고 보는 게 더 맞겠지요. SNS를 보면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고 그것을 매우 적극적으로 채워나가는 이들의 자랑이 한가득이니까요. 그런 것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나도 저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욕구는 있는데 둘러보면 자원은 희박합니다. 곁에 있는 매우 소수의 사람들뿐이지요. 그래서 개인들은 배우자나 연인들로부터 모든 충족 욕구를 집중시키게 되기 쉽습니다. 돈도 벌어오고, 요리도 해주고, 집안 일도 잘하고, 성적 욕망도 채워주고, 힘들 때는 위로도 해주고, 내 이야기도 들어주고, 내가 부모를 원할 때는 부모처럼, 내가 친구를 원할 때는 친구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둔갑하는 대상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기대가 너무 과도하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원은 매우 한정적이며, 변화할 수 있는 범위도 결정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누구에게 무한정의 자원을 제공할 수 없으며, 누구도 누구로부터 무한정 자원을 추출해 낼 수 없습니다.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탐 트루즈가 이야기한 “You complete me.”라는 말은 그저 우리의 희망 사항에 불과합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통해 완전해진다고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인간을 통해서 완전해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과도한 기대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사람의 모습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완전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려야 할 것입니다. 기대는 실망을 낳고, 연이은 실망은 화로 이어지기 쉬우니까요.
'평소에 든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고, 낙관과 긍정은 우리를 해칠 수 있습니다. (410) | 2024.07.04 |
---|---|
중재자의 자격은 무엇일까요? | 중재자 역할을 했던 수도자들 (396) | 2024.06.27 |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것 vs. 중요한 사람들의 말은 신경쓰는 것 (310) | 2024.06.20 |
탈피 Reptile 감상기 | 후기 | 베니시오 델 토로 | 저스틴 팀버레이크 | 베네치오 델 토로 (419) | 2024.06.13 |
왜 신경을 쓰다, 관심을 기울이다가 pay attention일까요? | 관심 | 주의력 | 집중력 (472) | 2024.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