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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너미> Enemy 후기 | 제이크 질렌할 | 드니 빌뇌브

RayShines 2024. 8. 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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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너미를 보고 쓴 후기입니다. 스포일러가 매우 매우 많으니 주의해 주세요.

 

아래 링크는 IMDB로 연결됩니다.

 

https://www.imdb.com/title/tt2316411/

 

Enemy (2013) ⭐ 6.9 | Drama, Mystery, Thriller

1h 31m | 18

www.imdb.com

 

 

에너미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3년 작입니다.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은 정말 충격적인 영화였죠. 아직도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기억날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신작인 에너미에 대한 기대도 매우 컸습니다. 미루고 미루다 너무 늦게 보게 된 건 저 조차도 좀 이상하네요. 빌뇌브 감독의 다른 영화는 대부분 다 봤는데 말이죠.

 

이 영화의 원작은 <눈먼 자들의 도시>로 유명한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입니다. 원작 소설의 제목에서 예측 가능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하고 있지만 다른 정체성을 가진 두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제이크 질렌할입니다.

 

주인공인 아담 벨은 우연히 보게 된 영화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져 그를 찾게 되고 그가 안토니 클레어라는 배우임을 알게 됩니다. 둘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매우 다릅니다. 아담은 역사 교수이고 매일매일 똑같은 삶을 삽니다. 무기력해 보이고 우울해 보입니다. 언제 감았는지는 머리칼은 늘 떡져 있고, 차림새도 늘 후줄근합니다. 반면 안토니는 꾸준히 운동하고 블루베리를 챙겨 먹고 멋진 옷에 고성능 바이크를 타는 남자입니다. 그리고 바람기가 있어서 임신한 아내인 헬렌은 그를 의심합니다.

 

아담은 안토니의 집에 전화를 하고 그 전화를 헬렌이 받게 됩니다. 헬렌은 몰래 아담의 학교로 찾아가 아담을 만나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담에 놀랍니다. 그리고 아담과 안토니는 서로 만나게 되고 서로의 모습에 놀랍니다. 그리고 안토니 몰래 아담을 미행하고 아담의 여자친구 메리를 보고는 매력을 느낍니다. 서로를 알기 전까지는 완전히 차폐되어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경계는 서서히 무너지고, 서로는 서로의 삶으로 침입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메리를 만나서 데이트를 하겠다는 안토니의 제안에 따라 안토니는 아담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담은 안토니의 집으로 몰래 들어가 안토니의 역할을 하게 되지요.

 

누군가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나게 되면 본인은 죽는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그렇습니다. 안토니가 아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본 메리와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언쟁을 벌이던 안토니는 차 사고로 사망을 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헬렌과 잠자리를 함께 한 아담이 방으로 들어간 헬렌을 뒤쫓아 들어가고, 헬렌이 거대한 거미로 변해있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에너미는 매우 난해한 영화입니다. 극 중 안토니와 아담이 동인 인물이 아닌가 하는 힌트가 주어집니다. 아담의 어머니가 아담에게 “넌 블루베리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 그렇고, “배우 놀이는 그만 하라”는 말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둘 다 아담이 아닌 안토니의 특징인데, 아들을 가장 잘 안다는 어머니가 아담에게 그런 말을 할리 없겠죠. 그리고 안토니의 아내인 헬렌이 안토니인 척하는 아담에게 “오늘 학교에서는 어땠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 비밀스럽게 전달된 열쇠를 본 아담이 망설임 없이 섹스클럽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알고, 헬렌에게 갈 곳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복선들 때문에 두 사람은 사실 한 사람이었다는 가정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안토니가 죽고, 아니면 적어도 죽는 것처럼 그려지고, 아담이 헬렌과 삶을 함께 할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람둥이에 헛된 꿈을 꾸는 자아는 소멸하고, 지루하지만 교수라는 좋은 직업을 가진 자아로 회귀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히 말하기에는 좀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아담에게 찾아간 헬렌을 아담이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하는 것은 두 사람이 실제로도 분리된 개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장치일 것 같습니다. 안토니가 메리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는 것 역시 그렇고요.

 

특히 영화의 도입과 중반부,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미는 영화를 더욱더 난해하게 만듭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비밀스럽고 외설적인 클럽씬에서는 한 여자가 밟아서 거미를 밟아 죽입니다. 그리고 중반부에는 거대한 거미가 도시를 활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헬렌이 거미로 변신해 있지요. 마지막 장면은 카프카의 변신을 떠오르게 합니다. 왜 거미일까요.

 

아프리카나 잉카에서 거미는 신이나 별의 창조주이며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존재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인도인들은 거미가 스스로를 높은 데로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라는 이유로 자유의 상징으로 보았다고 하고요. 시베리아, 베트남, 콜롬비아에서는 거미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에너미에서의 거미는 이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영화 초반 비밀클럽 씬에서 등장하는 거미는 성적 욕망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그 씬에서 거미는 쟁반 위에 올려져 나온 뒤 하이힐을 신은 발에 의해 짓밟힙니다. 성스러운 대상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 뒤 갑작스레 추악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영화 중반에 나오는 거대한 거미는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 생명체처럼 보입니다. 정복 대상이 지구가 아니라면 무엇을 정복하러 온 것일까요. 우리는 그 거미에 저항하려는 거일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헬렌이 변신하며 등장하는 거미는 교미 후 수컷을 잡아먹는 거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미는 아담이 자신을 보자 마치 놀란 듯 움츠러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아담은 거미를 보고도 그렇게 많이 놀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요. 아담에게는 거미로 변하는 여성들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것일까요. 그에게 여성들은 첫 번째 등장하는 거미처럼 성적인 대상인 동시에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혐오의 대상일까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Chaos is order yet undeciphered.”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혼돈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질서라는 말인데요. 영화는 혼란으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 안토니가 소멸하며 질서를 되찾는다는 뜻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여러 가지 자아를 갖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자아들이 원하는 여러 가지 욕망이 서로 상충하며 갈등을 느끼게 되지요. 안정적인 삶을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흥분으로 가득 찬 예측 불가능한 삶을 원하기도 합니다. 자유롭게 혼자 살고 싶기도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사는 삶을 원하기도 합니다.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직업을 갖고 싶기도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지식들을 정리하고 재분배하는 어찌 보면 따분하지만 안전한 직업을 원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혼란은 결국 절충, 혹은 한쪽 욕망의 소멸에 의해서 정리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해독(decipher)할 수 있게 되면 그제야 혼란은 사라질 테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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