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쓰는 감상기입니다. 스포일러가 아주 아주 많으니 영화를 보실 분께서는 주의해 주세요.
감독은 빔 벤더스입니다.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 등을 연출한 감독이지요. 주인공은 일본의 국민 배우라고 할 수 있는 야쿠쇼 코지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쿠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에서 야쿠쇼 코지가 보여준 연기가 정말 기억에 남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야쿠쇼 코지가 연기하는 히라야마라는 중년 남성입니다. 그는 도쿄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을 합니다. 그의 삶은 단순하며 규칙적으로 움직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양치를 하고 화분에 물을 준 뒤 출근을 합니다. 출근을 하기 전에 카메라, 열쇠, 동전을 챙깁니다. 그런데 그는 선반에 차례로 놓여진 물건들 중 시계만은 차지 않습니다. 아마 시계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서는 하늘을 보며 미소를 짓습니다. 차에 타기 전에는 집 앞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습니다. 차에 타서는 오랫동안 수집한 것처럼 보이는 올드팝을 카세트 테이프로 들으며 출근을 합니다. 그리고는 화장실 몇 개를 청소하고는 근처 공원에 가서 우유와 샌드위치를 먹습니다. 점심식사 중 그는 지금은 흑백 필름 카메라를 꺼내 나무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뷰파인더로 확인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릅니다. 오후에 몇 개의 화장실 청소를 더 하고는 집에 돌아와서는 동네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합니다. 그리고는 늘 가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책을 읽다가 잠에 골아 떨어집니다. 주말에는 시계를 차고는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빨래방에 가서 빨래를 하고, 헌 책방에 가서 100엔에 한 권짜리 책을 사고, 주말마다 가는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십니다. 사진관에 가서 현상된 사진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 와서는 핀트가 나간 사진은 찢어 버리고 비교적 잘 찍힌 사진은 날짜가 쓰여진 철제 상자에 넣어서 보관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요소 하나 하나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허투루 대하지 않습니다. 그의 방에는 그가 오랫동안 수집해온 것처럼 보이는 카세트 테이프와 문고판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책장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의 취미가 음악, 독서, 그리고 카메라라는 것을 보면 그의 과거가 거의 드러나지 않음에도 그가 지적이고 고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일, 열린 창문 사이로 보이는 나무, 비가 오는 날이든 화창한 날이든 무관하게 모든 하늘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삶에 애착을 갖고, 매우 규칙적으로 생활하지만 그것이 강박적인 집착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그는 차의 기름이 떨어지자 급할 것 없다는 표정으로 생각을 하다가, 갖고 있던 올드팝 카세트 하나를 팔아서 기름을 채우기도 합니다.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가 사람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과 활발하게 교류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나무와 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매우 과묵해서 말을 거의 하지 않고 함께 일하는 다카시에게도 손짓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가 거의 매일 마주치는 노숙자는 나무와 하나가 되고 싶은지 나무를 껴안고 있기도 하고, 나무처럼 하늘로 팔을 뻗은 채 가만히 서 있기도 합니다. 그 노숙자가 등에 맨 배낭에도 나뭇가지가 한아름 꽂혀 있습니다. 그래서 노숙자는 인물이라는 느낌보다는 배경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히라야마는 그 노숙자처럼 나무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히라야마가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의 정열(야생의 종려나무)>를 다 읽고 고른 책의 제목이 <나무>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사람들에 의해 계속 조금씩 흐트러집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을 사소한 것들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루틴이 깨졌다고 분노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가 삶에 애착하지만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그가 매주 가던 술집 여주인의 전남편이 서로 포옹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루틴에서 벗어납니다. 그는 자리를 떠나 편의점에 가서 맥주 세 캔과 담배를 삽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고는 심한 기침을 합니다.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그리고 여주인의 전남편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며 그가 암에 걸렸다는 사연을 듣습니다. 술집 여주인의 전남편은 그림자가 겹쳐지면 더 어두워지냐고 묻고, 히라야마는 가로등 앞에서 실험을 해보자고 합니다. 어둠이 겹치면 더 어두워지는 것이냐는 질문에 여주인의 전남편은 잘 모르겠다고 하고, 히라야마는 그런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있겠느냐”고 말하고는 갑자기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어둠을 멀리 쫓아버리려고 하는 듯 말이지요. 그런데 두 중년 남성은 숨이 차서 이내 그만 두고 맙니다. 어둠과 그림자는 우리를 늘 쫓아오는 것이고, 어쩌면 그것들이 여러 개 겹쳐지면 더 짙어지고 더 떼어내어 버리기 어려운 것이고, 나이가 들수록 아무리 달아나려고 해도, 아무리 쫓아버리려고 해도 우리에겐 그런 힘이 없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다음 날 그는 늦잠을 잔 것 같습니다. 서둘러 양치를 하고는 밖으로 나가 하늘을 보고는 웃습니다. 그리고 출근을 하며 울고 또 웃습니다.
그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들에 애착을 갖고 수집합니다. 오래된 책, 카세트 테이프, 언제나 반드시 필요한 장소인 화장실, 그리고 아마 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할 수 있을 화장실 청소일, 같은 장소에서 찍는 하늘의 사진을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스스로를 나무라고 생각하는 노숙인은 매우 서서히 변하지만 반드시 변하는 나무와 한 번도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일관인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되고자 하는 그의 바람의 현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중간에 그에게 찾아온 조카는 그를 웃게 합니다. 그리고 그를 딸을 데리러 온 그의 여동생은 기사까지 딸린 고급 렉서스를 타고 와서는 그에게 ‘그가 좋아했던’ 고급 초콜릿을 건넵니다. 그리고는 그가 정말 화장실 청소를 한다는 사실을 듣고는 슬퍼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버지가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나는 말을 들은 그는 여동생을 포옹한 뒤 차가 떠난 뒤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웁니다. 그는 가족들과 절연을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사람으로 보이진 않으니까요. 그의 과거에 뭔가 중요한 것이 매우 크게 변했었던 것일까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까지 변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영화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뒤에 “코모레비”라는 자막이 올라옵니다. 코모레비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빛과 그림자이며, 그 순간, 딱 한 번만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KOMOREBI: is the Japanese word for the shimmering of light and shadows that is created by leaves swaying in the wind. It only exists once, AT THAT MOMENT.”)
모든 것은 변하지만 어떤 것은 형태가 달라져도 늘 그것인 것이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의 삶은 그런 변하지만 변치 않는 것을 찾아나가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요. 영화 대사처럼 지금은 지금이고 나중은 나중인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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