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뒤늦게 보고 써보는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많으니 주의해 주세요.
이 영화는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찾아보면 사건을 조사했던 경찰서의 이름이 스가모인 것을 미루어 볼 때, 스가모는 동네 이름인 것 같습니다.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은 1987년 가을 당시 마흔 정도였던 아이들의 어머니가 네 아이를 집에 두고는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기 위해 떠나버린 사건입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8년 7월 17일 이 집으로 비행청소년들이 몰려든다는 신고를 받은 스가모 경찰서가 조사를 시작하며 아무도 모르고 있던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집니다. 실제 사건과 영화는 큰 차이가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영화에서 엄마는 유아적이고 충동적이고 제멋대로입니다. 집에 늦게 들어오고 밤늦게 친구들과 어울리러 나가기도 합니다. 자신이 음식을 해서 아이들을 먹일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장남인 아키라에게 저녁 메뉴를 묻기도 합니다. 둘째 딸인 쿄고는 엄마에게 술 냄새가 나자 물부터 떠다 가져다줍니다.
엄마는 아마 다른 남자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나가며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때까진 돌아오겠다고 합니다. 그런 엄마를 배웅하러 간 아키라가 엄마에게 제멋대로라고 하자 엄마는 아키라에게 “엄마는 행복하면 안 되느냐”고 항변합니다. 뭔가 부모, 자식 간의 역할이 바뀌어도 단단히 바뀌었죠. 또 학교에 보내달라고 하는 아키라와 교코에서 “학교 따위 다녀서 뭐 하느냐, 아빠 없는 너희가 학교에 가면 왕따를 당하다”며 기본적인 교육조차 시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사라진 이후 아키라는 세 동생을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지요. 가장 나이가 많은 아키라가 12살 밖에 되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도 16살은 되어야 한다며 거절당합니다.
아키라는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자신도 그런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아키라는 공과금을 내고 만화책을 보던 편의점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어울립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아키라의 얼굴을 아는 편의점 직원이 일행을 보고 친구냐고 묻고 아키라가 그렇다고 하자, 한 명이 매섭게 아키라를 노려봅니다. 자기는 아키라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지요. 아키라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게임기를 사고 친구들을 집안에 들입니다. 그러면서 집안은 서서히 엉망이 되어 갑니다. 써야 할 곳에 돈을 쓰지 않으니 전기도, 수도도, 전화도 끊깁니다. 집안에는 인스턴트 음식 쓰레기가 하나 가득 쌓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아키라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은 아키라의 집에 놀러 오지 않습니다. 그들을 학교 앞에서 기다린 아키라는 새로운 게임을 샀으니 집으로 놀러 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합니다. 그리고는 다른 친구에게 아키라의 집에서는 냄새가 난다며 놀리듯 말합니다. 애당초 그들은 아키라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은 거겠지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모두 끊기자 아이들은 공원에 가서 물을 떠오고,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받아와서 살아갑니다.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셋째 시게루가 우연히 말을 거며 아키라들은 사키라는 소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가까워집니다.
아키라는 도저히 이 생활을 더 유지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는 도망치듯 집에서 나와 근처 학교에서 야구를 하는 아이들을 구경합니다. 그런데 마침 한 명이 부족했나 봅니다. 아키라는 그래서 뜻하지 않게 야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막내 유키가 의자에서 떨어지며 크게 다칩니다. 아키라가 여느 열두 살들의 생활을 잠시 흉내 냈을 뿐인데, 세상은 아키라가 마치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듯 불행을 불러옵니다.
이 사고로 유키는 세상을 떠납니다. 유키에게 비행기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키라는 유키가 좋아했던 아폴로 초콜릿을 잔뜩 사고, 사키의 도움을 받아 유키를 가방에 넣어 하네다 공항으로 간 뒤 땅에 묻습니다.
영화의 초입에 엄마는 새롭게 이사를 간 집의 주인에게 자신에게는 아이가 아키라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전에 아이가 많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셋째와 넷째는 각자 커다란 가방에 넣어서 짐처럼 옮깁니다. 그리고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교코는 멀리서 기다리고 있다가 밤에 아키라가 집으로 데려옵니다. 집에 올 때 넷째 유키는 제일 작은 가방에 들어간 채로 왔는데, 그 사이에 유키는 키가 자라서 제일 작은 가방엔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셋째 시게루가 들어갔던 가방에 넣어져 옮겨집니다.
그리고 아키라를 제외한 아이들은 집밖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집주인에게 들키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유키는 자신의 생일에 엄마가 돌아올 것이라며 역으로 마중으로 나가겠다고 합니다. 아키라는 그런 유키를 처음으로 집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유키가 신을 신는데 신발이 너무 작습니다. 그 정도로 아이들은 집에 갇혀서 지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전부 아버지가 다른 것 같습니다. 아키라의 아버지는 하네다 공항에서 일을 했다고 하고, 교코의 아버지는 음악 프로듀서였다고 합니다. 시게루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 것 같고, 막내 유키의 아버지로 의심되는 사람은 둘 정도가 나옵니다. 이들의 엄마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충동적이고 결과를 생각지 않고 행동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지요.
어린아이들이 너무 가혹한 환경에 놓이거나, 방임을 당하거나, 학대를 당하거나 하면 심리사회적 가속 psychosocial acceleration 이라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우리말 표현으로 애어른이 된다고 할까요, 웃자란다고 할까요. 아이로서 당연히 누릴 권리 중 하나인 천진함을 빼앗기고 생존에 급급하게 되는 것이지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수립하고 실행해야 하는 프로젝트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고 당장 닥친 과제를 처리하기도 바쁩니다. 그래서 시야가 좁아지고 조망은 짧아집니다. 그리고 생존이 최우선이 되고, 그다음 과제는 번식이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심리사회적 가속이 일어난 아이들은 첫 번째 성관계 연령이 어리고, 초경 연령도 빠르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엄마가 교코에게 발라주는 빨간 매니큐어, 그리고 교코가 실수로 매니큐어를 떨어뜨리며 쏟아지는 빨간 매니큐어의 이미지는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선택으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계획과 장기적 안목을 갖고 준비를 해서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고, 한 순간의 충동으로 아무런 대비 없이 부모가 되기도 합니다. 부모, 환경, 세상은 그저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집니다. 어떤 생명체도 이런 것들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저 수동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나가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더욱 아픕니다. 이들 중 누구도 이런 삶을 원하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배가 고파서 종이를 씹는 삶을 누가 원할까요.
자신에게 어떤 삶이 주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리고 세상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고통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 역시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게 정말로 어려운 세상이 되었고, 그래서 태어나는 아이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로 모든 아이들이 사랑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태어나게 한 것으로 모든 책임이 끝나진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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