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을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인지적인 공감도 노력이 필요하고, 매우 필요한 능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MBTI가 유행하면서 감성적인 사람과 이성적인 사람 사이의 이분법적인 분류가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물론 인간을 지배하는 힘을 감정과 이성으로 나누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인간이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를 탄 존재라고 이야기했었으니까요. 그 두 마리 말이 이성과 감정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과거에는 이성적인 사고를 더 높게 평가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더 낮게 평가했던 반면 MBTI가 트렌드가 되면서부터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공감을 요구하는 상대에게 이성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안 좋은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시대가 됐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인간의 유형을 분류하는 일종의 게임적인 요소가 결합되며 MBTI가 크게 유행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MBTI 중 T와 F가 그토록 중요해진 것은 과거 우리 사회에 매우 자연스럽게 흐르던 “공감”이라는 미덕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는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서로를 비난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요. 그런데 온라인상에서는 대면 상태에서는 할 수 없을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오갑니다. 그러는 와중에 공감은 사라지고 비난, 조롱, 멸시만이 남아 있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공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화의 흐름 속에서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 반드시 가져야 할 필수적인 기술 중 하나가 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탑재하고 있던 기술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겐가 공감을 억지로 요구할 그다지 높지 않았었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더 공감을 잘하는 사람들과 공감능력이 그다지 높지 않은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 뻔하지만, 지금처럼 가상의 공간에서 - 하지만 우리 뇌는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 서로에게 공감은 완전히 배제하고 온갖 부정적 이야기만 쏟아내는 장이 합법적으로 운영되지는 않았던 것 역시 분명하니까요. 우리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SNS나 게시판 등에서 공감이 증발해 버린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더욱더 갈망하게 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얼굴도 모르고 만나는 사람들과 달리 실제 대면을 해서 만나는 이들이라고 하면 우리와 가깝거나, 우리에게 유의미하거나,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일 가능성이 한층 높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가상의 팔로워들과는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있을 가능성 역시 높습니다. 그리고 더 큰 기대를 하게 될 가능성도 높죠.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나의 취약함을 드러내고 위로와 공감을 구하게 될 수 있지요. 그런데 상대방이 나에게 위안과 평안을 제공하기보다는 현실적인 조언을 하며 일침충 노릇을 할 때 우리는 ‘아니 너같이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SNS나 커뮤니티에 얼마든지 있다고, 넌 걔네랑 달라야 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이럴 때 우리가 상대방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 너 T냐?”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가진 성격 구조적 특성에 대한 적시일 수도 있지만 “넌 F가 아니구나?!”하는 말이 숨겨진 일종의 비난에 가깝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적절한 공감을 제공하지 못하는 인지적인 인간들의 부족한 공감 능력을 문제 삼을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공감을 즉각적으로 얻을 수 없다고 해서 상대를 즉각적으로 비난해야 하는 측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성인이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가 만족을 지연하는 것인데 모든 것이 너무나도 즉각적인 세상이 되다 보니 마치 당일 배송이 당연해진 것처럼 공감 역시 내가 원할 때 척척 나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그 어떤 것들은 조금 기다려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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