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라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오래도록 관찰해 온 결과물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오랜 시간 변화하지 않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달력이라는 것은 정말 인위적이고, 어떻게 보면 작위적인 발명품입니다. 그냥 단순히 어느 날을 시작 날짜로 정하고 어느 날을 끝 날짜로 정한 뒤 그것을 1년이라는 임의로 정한 기간마다 반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달력이 얼마나 인간 본위적인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유럽이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달력 체제를 바꿀 때 어떤 이유에서인가 두 주를 건너뛰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달력에서 1582년 10월 10일은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1582년 10월 10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은 존재했었겠지만 그날의 이름은 다른 이름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태어난 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뀔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존재 자체는 바뀌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생일이 있는 8월이 30일까지 밖에 없는 반면, 카이사르의 생일이 있는 7월은 31일까지 있는 것을 질투해 8월도 31일까지 있는 것으로 바꾼 것도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이 정도로 달력이라는 것은 임의적입니다
그런데 절기라는 것은 참 신기하게도 맞아떨어집니다. 유난히 더웠던 올해 여름, 처서 매직이라는 말이 또 한 번 그 유효함을 스스로 증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느 문명이든 다 비슷하겠으나 대략 1만 년 전 정도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전까지 인간은 사냥을 하거나, 아니면 자연적으로 열려 있는 과일을 따먹으면서 생존하는 수렵채집민이었습니다. 이때는 내일의 날씨나 한 달 뒤의 날씨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생존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정말 날씨가 좋지 않아도 사냥을 해야 한다면 아무리 덥고 추워도 해야 되는 것이었겠지요. 따라서 날씨는 인간의 현재 행동에 큰 제약이 되긴 했겠으나 미래 계획을 결정하는 데 있어 비중 높은 변수가 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실 그리고 미래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을 것이고요. 그러나 농경을 시작하면서는 이런 게임의 법칙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농사를 짓는 것은 결국 날씨, 더 나아가서는 기후에 어떻게 적응하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얼마나 잘 적응했느냐에 따라서 생존이 달려 있습니다. 내일 날씨, 한 달 후의 날씨가 어떨지 대략적인 예측치가 있어야 거기 맞춰서 농사 일정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예측에 처참하게 실패한다면 생존 가능성이 역시 처참하게 떨어집니다. 예측할 수 없이 발생하는 홍수라든가 가뭄은 어쩔 수 없겠으나 대략적인 강수량이나 온도를 예측하지 못하면 농사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농사의 장점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면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생존할 수 있고, 운이 좋아서 수확량이 높은 해에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흉작 때를 대비해서 식량을 저장할 수도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농사를 시작하며 인간은 구전을 통해서든, 기록을 통해서든 날씨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쌓아 나갔을 것임에 분명하고 그것이 체계화되어서 만들어진 것이 절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절기에 문학적이고 낭만적인 이름을 붙이기도 했겠지요. 서양의 별자리들이 그 배경에 문학적 서사를 갖춘 신화가 곁들여져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아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유행이 하도 빨리 바뀌어서 뭐가 트렌드인지 따라가기도 어렵죠. 얼마 전까지는 어떤 아이돌 그룹에 제일 인기가 많다고 하더니, 오늘은 어제 데뷔한 팀이 더 핫하다고 합니다. 드라마도 예전처럼 6개월씩 하는 게 아니라 한 시즌이 8개 정도 에피소드로 한 번에 릴리즈되고 순식간에 소비된 뒤 순식간에 잊혀집니다. 이제는 무엇이든 빠르게 소비되고 빠르게 사장되는 그런 세상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들 중 몇 가지는 거의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지탱하는 사랑하는 이들, 나를 지켜주는 추억들, 그리고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아주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이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삶의 지혜들은 아무리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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