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추락의 해부 감상기입니다. 스포일러가 매우 매우 엄청나게 많으니 주의해 주세요.
아래 링크는 IMDB로 연결됩니다.
https://www.imdb.com/title/tt17009710/?ref_=fn_al_tt_1
이 영화는 76회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주인공 샌드라 휠러는 최근 개봉하여 엄청난 호평을 받고 있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도 나오는 배우입니다.
샌드라 휠러가 연기한 샌드라 보이터는 유명한 소설가입니다. 그녀는 남편 새뮤얼, 그리고 사고로 시각의 대부분을 잃은 아들 대니얼과 함께 프랑스의 외진 곳에 있는 농가(chalet)에 삽니다. 두 부부는 원래 런던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들의 의료비로 인해 재정적인 문제가 생겼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편의 고향인 프랑스로 와서 지냅니다. 극 중 샌드라는 꽤 성공한 소설가인 것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넉넉지 않은지 독일어 번역 부업을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자신의 꿈인 작가를 포기한 채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가의 다락을 리노베이션하여 에어비앤비 운영을 해보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추락사하고 당시 농가에 있던 유일한 사람인 샌드라는 용의자가 됩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법정 스릴러로 오인되기 쉬운 플롯입니다. 법리적 논쟁은 남편 새뮤얼이 자살을 한 것이냐,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샌드라의 변호인은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살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검사 측은 샌드라의 사생활까지 모두 까발리며 그녀가 남편을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법정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변론이나 법적 반전 같은 건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의 법정씬은 샌드라와 새뮤얼이라는 두 인물의 관계, 그리고 아들 대니얼의 사고를 둘러싼 두 사람의 감정 변화를 꼬치꼬치 캐묻고 들추는 관음증의 무대입니다.
<Anatomy of a fall>이라는 제목의 fall은 추락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몰락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남편 새뮤얼의 물리적 추락을 해부하기도 하지만, 독립된 두 인간이 축적해 온 역사의 몰락을 해부하기도 합니다. 새뮤얼 역시 샌드라처럼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사고가 자신의 탓이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 꿈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교사로 일하고, 대니얼을 홈스쿨링 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샌드라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생활을 포기합니다. 새뮤얼은 20~30페이지 남짓의 시놉시스를 쓰기도 하지만 장편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합니다. 샌드라는 그 아이디어를 가져와 3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써내고 평단의 호평을 받기도 합니다. 샌드라는 그 아이디어를 자신이 가져가는 데 새뮤얼도 동의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새뮤얼은 샌드라가 아이디어를 약탈(plunder)해갔다고 분노합니다. 새뮤얼은 자기가 샌드라와 대니얼, 그리고 농가를 관리하느라 글을 쓸 짬을 낼 수 없다고 항변하지만 샌드라는 누구도 그에게 그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고 하며 자신이었다면 어떻게든 글을 쓸 시간을 냈을 것이라고 쏘아붙입니다. 두 사람이 새뮤얼이 사망하기 전 날 나누었던 이 모든 가시 돋친 대화는 새뮤얼의 전화기에 녹음되어 있었고, 샌드라는 새뮤얼이 일부러 녹음을 하려고 자신에게 일부러 녹음을 한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하고, 경찰들은 새뮤얼이 법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녹음을 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부부로서 나눈 사적인 대화는 외력에 의해 찢어발겨지며 낱낱이 해부당합니다. 그리고 샌드라는 새뮤얼이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정신과 진료를 받았으며, 몇 개월 전 아스피린 음독으로 자살시도를 한 사실까지 이야기하며 새뮤얼이 자살에 무게를 실으려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인 대니얼은 법정에서 새뮤얼과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키우는 개인 스눕이 아팠을 때 수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새뮤얼이 했던 말이지요. 스눕은 대니얼이 뭘 원하는지,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알아차리고 대니얼을 위해서 살고 있는데 언젠가는 그런 삶에 지쳐서 떠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정해진 것이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지요. 이 말을 하며 대니얼은 “그게 아마 아빠 자신의 이야기였을 거에요”라고 말하며 새뮤얼이 자살했을 것이라고 암시합니다.
결국 샌드라는 무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대니얼은 “엄마가 집에 돌아오는 게 무서웠다”고 이야기합니다. 샌드라도 대니얼에게 “나 역시 집에 오는 게 무서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샌드라는 대니얼을 안아주는데 대니얼이 샌드라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모습이 마치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자리가 바뀐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마치 대니얼이 어른 같고, 샌드라가 아이 같이 느껴지는 씬입니다. 이 장면으로 인해 생각이 깊어지게 됩니다. 샌드라가 새뮤얼을 살해했고, 그것을 알고 있던 대니얼이 샌드라를 보호하기 위해 법정에서 위증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시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반드시 누군가가 필요한 대니얼은 샌드라가 없다면 생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없는데 어머니까지 누군가 빼앗아 가버린다면 대니얼은 이를 견디기 어렵겠지요. 샌드라는 대니얼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대니얼이 외출한 사이 새뮤얼을 살해했을 수도 있겠지만, 영화 중간에 나오는 것처럼 대니얼의 청각 기억은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보지 못해도 대니얼이 뭔가를 듣고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대니얼은 부모의 언쟁을 실제로 들었는지, 들었다면 집 안에 있을 때였지 집 밖에 있었는지 헛갈린다고 증언하지만, 영화의 초반부를 보면 대니얼이 집을 나갈 때 샌드라는 2층에서 떠나는 여대생을 배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새뮤얼 사망 당일 부부 사이의 언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니얼은 그때 집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뮤얼이 사망하기 전 날 두 사람이 다투다가 컵을 던져 깨뜨리고 샌드라가 새뮤얼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던 것을 대니얼은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만약 샌드라가 새뮤얼을 살해한 것이 사실이고, 대니얼이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샌드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혹은 보호하기 위해 거짓을 꾸며냈다면, 대니얼과 샌드라는 서로에게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대니얼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샌드라가 두려울 수 있을 것이고, 샌드라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이제는 무서울 정도로 성숙해진 아들이 두려울 수 있겠죠.
사실 새뮤얼이 자살을 한 것인지, 아니면 샌드라에 의해 살해당한 것인지, 아니면 제3의 인물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실족사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샌드라는 새뮤얼의 방 침대에 가서 눕습니다. 그러자 스눕이 침대에 올라와 그녀 곁에 함께 눕습니다. 대니얼은 듣고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보진 못합니다. 스눕은 대니얼이 들은 것 이상으로 모든 것을 봤겠지만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제는 세상에 없는 남편의 침대에 누워 개를 쓰다듬으며 짓는 그녀의 미소는 결백함이 밝혀진 것에 대한 홀가분함으로 인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죗값을 피하게 된 것에 대한 만족스러움 때문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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