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슬로우 호시스(Slow Horses)>를 보고 써보는 감상기입니다. 스포일러가 매우 많으니 드라마를 보실 분들은 읽지 않으시는 게 낫겠습니다.
슬로우 호시스는 애플 TV의 드라마이고, 시즌 4까지 나와 있습니다. 시즌 하나당 에피소드는 6개라 사건 전개가 빠르고 답답하지 않습니다. 스파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이는 꼬이고 또 꼬이는 플롯, 생각을 알 수 없는 인물들, 반전을 거듭하여 나중에는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 보이게 하는 그 특유의 답답함이 없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점이라면 역시 시즌 하나가 너무 짧다는 느낌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슬로우 호시스의 주인공의 개리 올드만입니다. 개리 올드만의 은퇴작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했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의 연기력은 이 드라마에서도 압도적이고 독보적입니다. 그리고 덩케르크의 주인공이었던 잭 로든, 잉글리쉬 페이션트로 유명한 크리스틴 스캇 토마스도 출연합니다.
슬로우 호시스는 제목 그대로 slow horses, 느린 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MI5 요원들이지만 뭔가 커다란 실수를 해서 자격 미달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슬라우 하우스(Slough House)라는 곳으로 좌천되어 버립니다. 드라마에서 MI5의 본부는 파크 Park 라고 부르는데, 파크의 요원들은 주인공들이 슬라우 하우스에서 일한다는 말을 들으면 비웃고 멸시합니다. 심지어 파크에서 임시통행증을 발급해 주는 직원조차 주인공을 무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슬라우 하우스는 개리 올드만이 연기하는 잭슨 램 Jackson Lamb 이 수장으로 있습니다. 그는 머리도 감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고 샤워도 제대로 안 하고 아무 데서나 방귀를 뀌고 하루 종일 위스키를 마셔댑니다. 그의 떡진 머리칼과 제대로 닦이지 않은 안경, 그리고 때가 잔뜩 탄 트렌치 코트는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 스파이들의 말씀한 수트와 완벽한 헤어스타일과는 거리가 매우 멉니다. 그는 유능한 요원이었던 것 같지만 어떤 이유에서인가 슬라우 하우스로 옵니다.
그의 이름이 Lamb 인 것은 뭔가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양 lamb 은 약간 멍청해 보이지만 화가 나면 전속력으로 달려 상대를 들이받는 공격성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털이 끝도 없이 자라 쉽사리 지저분해지는 동물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아주 제멋대로라서 보더 콜리 같은 똑똑한 개들의 관리가 필요하기도 한 동물입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에서는 현장의 전투요원들을 개 dog 라고 부릅니다.
슬라우 하우스의 다른 인물들은 시즌에 따라 조금씩 바뀝니다. 전사가 나오는 인물도 있고 가려진 인물들도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매우 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대부분이 중독입니다. 어찌 보면 대단히 큰 결핍을 갖고 있는 인물들인 것이지요. 뭔가 자기 내부에 난 큰 구멍을 채우기 위해 뭔가에 탐닉하지만 아무리 채워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그런 공동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램은 알코올 중독이며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는 니코틴 중독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비서인 스탠디쉬 역시 알코올 중독자이며 AA 같은 알코올 자조 모임에 나가고 있습니다. 해커 역할을 하는 로디는 하루 종일 레드불을 마셔댑니다. 시즌 1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 마커스는 도박 중독자이며, 역시 시즌 1에는 등장하지 않는 셜리는 마약 중독자입니다. 이들은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은 슬라우 하우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그 역시 그들이 가진 중독 문제처럼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중독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인 리버 카트라이트와 루이자 가이는 뭔가 복잡한 과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리버 카트라이트는 시즌 4로 가면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데 그 과정이 꽤나 복잡하고 또 다음 시즌에도 꾸준히 등장할 인물을 예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루이자 가이는 정확히 슬라우 하우스로 오게 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뭔가 동료들과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잭슨 램과 캐서린 스탠디쉬를 제외하면 모든 인물들은 슬라우 하우스에서 벗어나 MI5 요원으로서 인정받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의 면접을 보기도 하고, 좋은 실적을 올리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문제, 그리고 그들이 슬라우 하우스에 있다는 자체로 인한 선입견 때문에 그게 쉽진 않은 것 같습니다. 한 번 결정되면 누군가에 대한 의견이나 인상은 쉽사리 바뀌지 않으니까요.
슬라우 하우스의 슬로우 호시스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야 마땅할 것 같지만 이들의 주변에는 항상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사전의 중심에는 잭슨 램과 리버 카트라이트가 있습니다. 리버 카트라이트의 할아버지 역시 MI5에서 일했었고,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후광을 입었음에도 불후하고 슬라우 하우스로 강등됐는데 그 과정이 뭔가 석연치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꽤 괜찮은 능력을 가진 요원이어서 잭슨 램과 함께 사건을 해결해내가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리버는 소년 같은 미소를 띠며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날카로운 판단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또 한 명의 중요 인물은 크리스틴 스캇 토마스가 연기하는 MI5 부국장 다이애나 타버너입니다. 다이애나는 로마 신화에서 사냥의 여신이지요. 타버너 역시 엄청난 야망과 목적의식을 가진 인물로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늘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에 너무나도 깔끔한 헤어스타일, 그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얼핏 봐도 명품일 것만 같은 절제된 장신구들을 하고 등장합니다. 그 모습이 잭슨 램과 너무나도 대비됩니다. 램은 온몸에 진흙과 똥을 묻힌 양 같고, 전투요원들인 개들 dogs 을 진두지휘하는 그녀는 잘 관리된 근육질의 도베르만 핀셔 같은 느낌입니다.
드라마의 부정할 수 없는 주인공인 잭슨 램은 입에 담배와 술, 그리고 욕을 달고 살고 요원들에게 꺼지라는 말을 거침없이 하며 부하직원들의 기분 따위는 전혀 생각지 않고 인신공격을 합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위악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는 자신의 요원 - 드라마에서는 Joe 라고 표현합니다 - 이 다치거나 피해를 보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지 않고 전력을 다해 반격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변인들을 밀쳐내는 것은 “아무도 다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누구에게도 애착을 가지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보이는 복선들이 나옵니다.
슬로우 호시스는 정말 재미있는 드라마입니다.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같은 치밀한 서사나 미션 임파서블 같은 액션을 원하신다면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즌 하나당 6개의 에피소드에 조밀하게 밀어 넣은 꽤 괜찮은 스토리와 명배우들의 좋은 연기를 보시고 싶다면 강력히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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