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 |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 | 슬픔 표현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장치

RayShines 2024. 11. 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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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슬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슬픔을 마음 놓고 표현하는 것이 널리 용인되지 않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도 한 번 인용한 적이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중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깊디 깊은 슬픔에는 눈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다. 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어서 소리를 내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나 나이를 먹었고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이 세계에는 눈물조차도 흘릴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깊은 슬픔이 눈물마저도 빼앗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 혹시라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런 슬픔은 다른 어떤 형태로도 바뀌어지지 않고, 다만 한 줄기 바람도 불어오지 않는 밤에 내리는 눈처럼 그냥 마음에 조용히 쌓여가는 그런 애달픈 것이다. 조용히 쌓이는 눈은 슬프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나는 그런 슬픔을 어떻게 해서든지 언어로 표현해 보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아무에게도 전달할 수 없었고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도 전할 수없어서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언어를 폐쇄시키고 나의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

 

정말 어떤 때는 슬픔을 표현하기 어려운 때가 있죠. 그리고 나의 슬픔을 표현한다고 해도 누구에게도 공감받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 들 때도 있죠. 과연 나의 복잡한 사정과 감정을 상대방에게 모두 전달하는 것이 가능할까,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고 해야 할까요.

 

슬퍼하는 인간의 표정, 그리고 눈물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특히 아래로 내리 깐 눈, 가라앉은 눈꺼풀, 내려간 입꼬리, 그리고 거기 눈물이 더해지면 더욱더 그러합니다. 울고 있는 사람을 보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마음이 아프고 그 사람이 울고 있는 이유와는 무관하게 위로를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슬퍼하는 인간은 연민과 동정, 공감을 얻는다는 감정적 이득을 취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속한 집단에서 의무를 면제받을 수도 있을지 모르며 슬퍼서 일을 할 수 없을지 모르니 노동 없이 자원을 취득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런 실리적 계산을 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어떤 집단이나 갖가지 형태로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을 위한 복지를 구성합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슬픈 일은 닥칠 수 있고, 그럴 때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한편 사회에서는 무분별하게 슬픔을 표현함으로써 의무의 면제, 자원의 취득, 공감의 획득 등을 견제하려는 장치도 발달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는 남자는 울면 안 된다, 남자는 인생에 있어서 세 번 운다는 등 남성이 슬픔을 표현하는 것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듯한 어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중장년층 세대의 남성분들은 슬픔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지 않고, 가끔은 그 표현이 인색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던 패밀리라는 드라마를 보니 미국 남성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더군요.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가 여자친구에게 차였을 때도 샌드위치를 먹고 잊으라고 했다던지, 쇄골이 부러졌는데 풋볼을 하다가 기절했다든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전혀 울지 않았다던지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wRJU2ZKt8s

 

 

그 이유야 어떠하든 우리 사회는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슬픔의 표현이 아니라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통제력 상실의 증거라고 보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성인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운다면 그 역시 권장할 일은 아니겠으나 깊은 슬픔을 표현할 때조차 사회적 규범의 제약을 받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요. 누구에게나 기쁨과 슬픔을 나눌 누군가는 필요하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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