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집단 패러다임 Minimal Group Paradigm 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인간들에게는 아주 작은 공통점만으로도 무리를 구성하는 경향성이 있으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과 다른 무리에 속한 이들에 대해서 차별과 편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도 인간은 편을 나눕니다.
아주 간단한 실험을 한 연구자가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에게 점 40개가 그려진 종이를 0.5초 간 보여준 뒤 그 종이 위에 찍힌 점의 개수가 몇 개인지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냥 참가자들을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무런 의미 없는 과제를 준 뒤 아무런 기준도 없이 집단을 둘로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한 그룹에는 “당신들은 실제 개수보다 적게 말했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쪽 그룹에는 “당신들은 실제 개수보다 많게 말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참가자들 중 한 명에게 돈을 주고는 그것을 분배하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이 그룹들은 완전히 무작위로 나뉘었기 때문에 돈을 공평하게 분배하리라는 것이 실험자들의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피험자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더 편애했고, 자기가 속한 집단이 받는 돈이 상대 집단보다 많기만 하다면 받는 돈이 적어져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 실험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부족주의에 빠지는지 보여줍니다. 딱히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이는 기준으로도 편을 가르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편에 속한 사람들은 편애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배척하고 편견을 가집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패를 가르고 싸우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편을 가르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고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편을 가르지 않거나, 편을 고르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대표 격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는 미국이 왜 복수정당제가 아니라 양당제를 택하고 있을까요. 정말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정당을 모두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미국같이 민주주의가 발전한 국가에서도 국민들에게 양자택일을 종용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마음속 깊이에는 이분법적 사고 말고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 편이 정해지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매우 간단해집니다. 편, 진영, 노선, 당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사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느냐와 무관하게 진실이나 진리는 정해져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어린아이들도 그렇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편이 정해지고 나면 진실과 진리도 따라서 달라지는 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느냐보다 우리 편 중 다수가, 혹은 우리 편 중 강력한 권위를 가진 그 누군가가 무엇을 옳다고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편의 다수가 가진 의견이나 우리 편의 수장이 가진 의견에 반기를 드는 것,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가진 의견이 상대편의 의견과 유사하다면 그것은 내가 더 이상 이 편이 아님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 것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같은 편의 다른 의견이라도 수용할 수 있어야 성숙한 것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에 대해 더 엄정한 대응을 하는 것이 조직을 와해시키지 않는 데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견이 용인되면 앞으로는 이견을 내놓는 것을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대편과 싸울 때 응집력이 사라질 테니까요. 상대편도 똑같은 논리로 생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각 집단은 일부러 서로의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기도 합니다. 상대편과 같은 의견을 내놓게 되면 분쟁이 사라질 것이고, 분쟁이 사라진다는 것은 정체성을 드러낼 무대가 사라지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물론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두 집단의 의견이 사실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에 있겠지요. 같은 의견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정도로 말입니다.
세상에는 다양성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있어야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사회겠지요. 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의견 개진과 피아식별을 위한 논쟁은 분명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대한 문제가 아닌 것으로 편을 가르는 것 역시 불필요한 힘과 자원을 낭비하게 하는 소모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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