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트라우마의 의미가 갈수록 확장되는 것은 좋은 것일까요?

RayShines 2024. 12. 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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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이제 매우 널리 쓰이는 말이 됐습니다. 널리 쓰이는 만큼 그 의미가 변화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트라우마는 죽음의 위협, 심각한 부상, 성적 폭력 등을 직접 경험하거나, 누군가가 트라우마 사건에 노출되는 것을 목격하거나, 매우 가까운 사람에게 트라우마가 일어난 것을 알게 됐거나, 트라우마 사건과 관련된 매우 세부적인 내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참전 용사나 경찰 같이 늘상 폭력에 노출되는 직군에게 많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군인이나 경관들에게만 국한해서 쓸 수 있는 용어는 아니라는 것 역시 분명합니다. 아이들이 반복적인 학대나 방임에 노출되는 것 역시 트라우마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까요.

 

고전적으로 의미에서 트라우마는 신체적 위해나 손상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심리적 트라우마 역시 개인의 안녕에 매우 중대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뉴스나 드라마에서도 이런 문제를 흔히들 다루는 경우가 많고, 전문가들이 나와서 이에 대해서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누는 프로그램도 많으니까요. 그래서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트라우마는 이제 매우 친숙한 개념이 되었고, 누구나 쉽게 쓰는 용어가 됐습니다. 그런 만큼 그 범위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트라우마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으려면 정말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나 경험이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 그저 흔히 벌어질 수 있는 부정적 사건들에게 모두 트라우마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다면 트라우마라는 용어는 그저 나쁜 경험이라는 용어를 대체하게 될 것이고, 결국 진짜 트라우마라는 말을 의미할 수 있는 새로운 용어를 고안해 내야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니까요.

 

심리적 트라우마라는 말이 성립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정신에 어떤 경험이나 사건이 트라우마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일 테고, 정신적 작용의 특성상 그 경험이나 사건이 물리적인 작용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상호작용에 있어서도 트라우마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범위가 확장됨에 따라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 글, 그림, 의견 그 모든 것에 의해서도 누군가는 트라우마를 입을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누군가 누군가에게 어떤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부정적 영향을 주려고 했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트라우마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일상적으로 오가는 말들, 특히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겠다는 의도가 없이 무심결에 했던 말들이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 누군가는 악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정말 선의나 호의로 한 말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매우 “주관적으로” 그것이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 그때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트라우마의 본질을 결정하는 데 있어 작용을 주는 쪽의 의도나 사건 자체의 중대성, 위해성 그 자체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판단이 더 중요해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당연히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뻔히 상처 주는 말을 해놓고는 “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고, 그럴 의도도 아니었다”고 발뺌을 하면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존재하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말은 전적으로 맞습니다. 어찌 보면 누군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내가 경험하는 “주관적 느낌”이 더 중요한 판단의 근거로 작동하게 된 것은 상대방의 기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가시 돋친 말을 한 뒤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 “아끼기 때문에 하는 말”, “널 위해서 하는 말”이라며 포장하고, 자신의 무신경함을 선의로 뒤바꾸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건이 트라우마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요소 중 그것에 대한 내 주관적 판단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트라우마에 압도되는 것만큼이나 트라우마로 인한 성장도 가능해질지 모릅니다. 이 말이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분들께 “이겨내라”는 강요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제 바람은 어떤 용어의 인플레이션이 실제로 그것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괴로움을 희석시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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