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벤담은 둘 다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학자였습니다. 둘은 세상을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한 가지 명제를 찾고자 했고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주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칸트는 1724년에 태어났습니다. 많은 뛰어난 이들이 그러했듯 칸트도 진리를 찾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진리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에게 한 가지로 똑같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규칙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구체적인 규율은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옳을 수도 옳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매우 추상적인 규칙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이른바 칸트의 정언명령입니다.
"네가 할 수 있고 또 하고자 하는 일이 보편적 법칙으로 마땅할 때, 오로지 그것만을 규범으로 삼아 행동하라.”
칸트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만한 규칙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고, 대신 개개인이 행동하기에 앞서 자기가 행동하게 하는 준칙이 보편적일 것이냐를 스스로 자문해 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만약 칸트가 트롤리 딜레마에 놓인다면 아마 5명을 구하기 위해 1명을 희생 - 혹은 살해 -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 법칙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겠지요. 칸트는 우리가 지켜야 할 보편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은 협상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칸트와 그의 이론을 따르는 이들은 의무론자라고 부릅니다.
벤담은 1748년에 태어난 뒤 12살에 옥스포드에 입학한 천재였습니다. 그는 변호사가 된 이후 영국의 법률들에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쇄신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원칙을 한 가지로 압축하려 했습니다. 세상이 작동 원리를 한 가지 공식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계몽주의자들처럼 말입니다. 그가 내세운 원칙은 아주 단순한 산수에 입각한 이론이었습니다. 바로 공리주의이지요. “가장 많은 이들에게 가장 많은 행복을 가져오도록 하라”, 이른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이든 이 원칙에 따라 그것을 승인하거나 불허할 수 있으니, 그 행동이 이해 당사자 집단의 행복을 분명 증진시키리라고 보이는지 아니면 감소시키리라고 보이는지에 따른다.”
그런데 벤담의 원칙에 따르면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화되기 쉽습니다. 벤담은 트롤리 딜레마에서 1명을 희생시켜서라도 5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과를 극단적으로 중시하기 때문에 벤담과 그의 이론을 따르는 이들을 결과주의자라고도 합니다.
칸트와 벤담 중 누가 옳으냐, 누구를 따라야 하느냐는 결론 내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도덕, 윤리, 옳고 그름은 정말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니까요. 그러나 18세기에 태어난 이 두 사상가들의 생각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생각해 볼거리를 던져줍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다수결은 과연 옳은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찬성하면 그것은 선일까요. 만약 전체 인원의 과반 중 3분의 2가 찬성하면 그것은 집단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2분의 1의 3분의 2는 전체의 3분의 1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3분의 2는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았거나 이에 반대한다는 뜻이겠지요. 공리주의적으로 이것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치를 위해서 그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트롤리 딜레마의 스케일을 훨씬 크게 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5명을 희생시켜서 10명을 구할 수 있다면, 혹은 1000명을 구할 수 있다면, 100만 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요?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에 문제가 생겨서 그 안에서 일하는 직원 10명의 생명을 희생시키면 인근에 살고 있는 인구 200만 명은 안전할 수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글은 아닙니다. 다만 요즘 들어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에 대해 예전만큼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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