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이 글을 읽는 것을 반대했다고 하지요. 말이 더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젊은 세대들이 디지털 매체에서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짧은 글만 읽는 것에 기성세대들이 우려를 표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철학자이자 현자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런 깊은 지식을 갖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가 책을 통해 지혜를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지식은 책에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소크라테스도 글을 읽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문어, 즉 글과 책의 확산에 극렬한 반대를 표명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확실친 않으나 그리스의 문자는 대략 기원전 8~9세기에 발명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후 거의 400년 간 그리스인들은 문자를 사용하는 것에 인색했다고 합니다. 대신 모든 지식을 암송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기가 기원전 470년에서 399년까지이므로 계산을 해보면 소크라테스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가 구어에서 문어로 서서히 전환이 이루어지는 과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 소크라테스는 문어의 확산에 크게 반발했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소크라테스가 들었던 이유는 대략 세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말과 달리 글은 의문이나 이견이 있어도 맞받아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글이라는 것에 의존하면 기억력이 파괴된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 이유는 말과 달리 글은 무분별하게 확산되어 준비되지 않은 이들이 읽게 되면 피상적 이해, 혹은 더 나아가 오해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디지털 환경으로 완전히 전환이 이루어진 시대이므로 과도기라고 볼 수는 없으니 소크라테스 시대와 비슷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우려했던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 깊이가 얕아지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학자들의 걱정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통해 더 깊은 생각을 하고,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문서로 저장된 지식이 아니라 많은 지식을 암기한 뒤 그것으로부터 지혜를 자연스럽게 지혜를 추출해 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진정한 진리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글만 읽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표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기성 시대들은 적극적 사고 과정을 거치며 긴 글을 읽어나가는 전통적 형태의 독서 대신, 일방적으로 흩뿌려지는 짧은 글을 소모하듯 읽고 치우고 다시 다음 단문 조각으로 넘어가는 방식의 읽기가 젊은 세대의 사고력과 문해력에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글 자체를 반대한 것이고, 지금의 학자들은 독자의 내부에서 활발한 네트워킹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읽기에 반대하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디지털 세대의 읽기 능력과 문해력, 그리고 집중력, 그리고 생각하는 능력 등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떨지는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소크라테스의 걱정 역시 기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책이 지식의 원천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으니까요.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발생하는 사고 체계의 변화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에 가깝습니다. 소크라테스라는 개인도 그렇게 할 수 없었고, 현대 사회의 많은 이들이 디지털 매체에 반대한다고 해도 그 시류와 메가 트렌드는 절대로 거스를 수 없습니다. 결국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만약 긴 글에 익숙했던 이들이 모두 죽은 뒤라고 하더라도 이런 류의 논쟁이 없을 것이냐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세대 간의 차이는 늘 있어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기술의 발전 속도를 생각해 보면 미래에는 세대를 나누는 간격은 더 짧아지고, 세대 간의 갈등은 더 첨예해질 가능성이 높지요.
하지만 이런 논의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긴 글을 읽을 수 있느냐가 세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체가 세대 사이의 갈등을 부르는 단초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긴 글을 좀 읽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렇지 않은 젊은 세대를 가벼이 본다면 그게 꼰대겠지요. 다만 오래 세월과 역사, 그리고 무수한 독자들의 비평이라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이겨낸 긴 호흡의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행위의 즐거움이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는 합니다. 물론 쇼츠를 보는 것 역시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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