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좋은 부모는 어떤 부모일까요? 아이는 작은 어른일까요, 아니면 아이는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존재일까요?

RayShines 2025. 1. 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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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부모는 어떤 부모일까요? 많은 부모들이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방법은 무엇 일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 개인적으로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개인의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존립, 경제 발전 속도의 저하 등을 이유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의 시각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한편 국가나 정부라는 것은 개인들 사이의 계약의 산물이고, 따라서 개인이 없으면 국가와 정부도 없는 것이니 국가가 개인에게 매우 중대한 문제를 강제할 수는 없다고 보는 시각에도 공감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딩크의 결정도 존중하고, 다둥이를 둔 부모들도 존경합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있다는 가정 하에 좋은 부모가 좋은 부모인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노선에 따라서도 양육에 대한 시각이 크게 다릅니다. 물론 종교에 따라서도 그렇습니다. 요새는 매우 영향력 있는 학자들이 아이들과 양육에 대해서 가지는 의견에 따라서도 저희 같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달라지는 것 같고요. 그러나 아마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좋은 부모의 기준이라는 것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좋은 부모라면 모름지기 어떠 어떠해야 한다는 명령도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경우에서 가장 어린 사형수는 8세의 존 딘이었습니다.

존 딘은 당시 윈저타운 근처의 헛간에 불을 질렀다는 이유로 교수형이 처해졌다고 하는데요. 당시 형사책임 연령은 불과 만 7세였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에 갓 들어갈까 말까 하는 나이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웠던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당시의 그림들을 보면 아이들을 작은 어른으로 취급하는 듯한 인상이 강하게 풍긴다고 합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아이들은 그저 경험이 부족하고 그로 인해 지혜 역시 부족할 뿐, 훈육을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이들을 철저히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법적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또한 그런 생각 때문에 아이들을 혼자 둬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경우 부모들이 처벌을 받는 국가도 있습니다. 리노어 스커네이지의 사례가 아주 유명하지요. 2008년 그녀는 9세이던 아들을 백화점에서 집까지 혼자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돌아오게 한 경험을 블로그에 올렸다가 “미국 최악의 엄마”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무려 16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이후로도 전 세계적으로 아이를 과잉보호하는 경향은 지속되었고 2014년 미국에서 9세이던 딸을 혼자 놀게 했던 여성은 한 여성의 신고에 의해 아동방임죄로 기소되었고 17일 간 딸과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역사적 흐름을 보면 과거에는 아이들을 “작은 어른”으로 보고 엄격하고 가혹한 훈육을 한 때가 있었고, 최근에 들어서는 아이들을 “작고 유약한 존재”로 보며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에 대한 논의를 해볼 수 있겠습니다만, 이런 질문이 나올 때의 답은 늘 그 중간 어디 즈음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분명 보호받아야 되는 존재들인 것 맞습니다.

아이들은 경험이 부족하고, 그 때문에 지금 행동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따를 것인지에 대한 예측도 어른들에 비해서는 부정확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어떤 결과가 닥칠지 알면서도 또래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니면 단순한 즐거움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도 하지요. 따라서 실수를 할 때도 많고,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것이 분명한 일을 하기도 하지요.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아이들의 주변에 적절한 경계선을 긋는 것은 반드시 필요해 보입니다.

 

 

 

한편, 아이들 주변에 처진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 때문에 아이들의 경험이 더욱더 협소해지고, 그로 인해 자신감을 잃고, 시도해 보겠다는 의욕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구나 처음은 있습니다. 그 처음이라는 것을 언제 경험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긴 합니다만, 아이들을 영원히 네모반듯한 방 안에서만 지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부모들은 자신의 딸이 다치게 될 것이 두려워 말레피센트를 파티에 부르지 않고, 물레에 찔릴 것이라는 저주를 피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물레를 거두어들이고 불태워버렸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물레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믿었던 성의 탑 안에 남아 있었듯, 우리는 세상의 모든 위험을 제거할 수 없고, 어찌 보면 최악의 위험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격리하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아이의 정신적 취약성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탑 안의 어두운 골방에 도사리고 있던 마지막 물레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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