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는 배시가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가장 달콤한 노래를 불러주었다. 내게도 햇살처럼 환한 때가 있었다.”
위의 구절은 샬롯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드에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소설 <제인 에어>의 주인공인 제인 에어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삼촌의 집에 맡겨졌지만 외삼촌도 곧 세상을 떠나며 그녀를 미워하는 외숙모에게 길러집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외사촌이 있는데 그중 막내인 남자아이는 제인 에어를 업신여기고 때리기도 합니다. 섬세하고 영리하기도 한 동시에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굴하지 않았던 제인 에어는 그 집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이를 놓치지 않습니다. 사실 학대를 당하거나 방임 상태에 처한 많은 아이들은 자신이 그런 처우를 받을 정도로 무가치한 존재가 아님을 이해하고, 자신의 가치를 선언하고 더 나은 대우를 주장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직 혼자서는 생존하기 어려운, 신체적으로 나약하고 자립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에게 의식주를 제공해 줄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혼자 힘으로 최소한의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나이가 15세라고들 합니다. 다시 말해서 15세가 되기 전의 아이들은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아무리 악의적인 보호자와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아이들이 내리는 결론은 인간이라면 모두 마땅히 갖고 태어난 가치가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고, 자신은 그런 취급을 받아도 괜찮은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자존감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타격을 주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다음 단계로 발전시키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하며, 일단이 더 나아지기 위해 필수적인 장기적 조망도 함께 앗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학대, 방임을 당한 아이들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보다 현재를 살아나가는 것, 더 정확하게는 살아남는 것에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오늘 밤에 심하게 맞아서 다칠지도 모르고,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1년 뒤에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미래를 위해 현재의 욕구를 지연하며 지루한 책을 읽고, 하기 싫은 운동을 하고, 규칙과 순서를 지키며 타인의 권리까지 존중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하고, 음식이 있으면 그저 먹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훔쳐서라도 갖는 게 생존을 위해서는 유리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인 에어가 그런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인 에어는 그녀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던 외숙모의 결정에 따라 매우 엄격한 규율을 가진 기숙학교로 보내지게 되리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녀는 그곳이 아무리 끔찍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이곳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희망을 갖고 그곳으로 떠납니다.
그녀가 그렇게도 끔찍하게 여기던 외숙모의 집에 배시라는 하녀가 있었습니다. 그녀 역시 제인 에어에게 늘상 우호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제인 에어를 안아주고, 키스해 줍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래도 불러줍니다. 제인 에어는 생각합니다.
“내게도 햇살처럼 환한 때가 있었다(Even for me life had its gleams of sunshine).”
세상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의 방식이나 형태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아이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제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아끼는 마음은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부모들은, 혹은 혈육이 아닌 보호자들은 아이들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우면 아이들을 짐스럽게 여길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너무 힘든 나머지 아이들에게 모든 분노와 원망을 쏟아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온 세상이고, 전부입니다. 아이들은 다른 부모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다른 세상을 경험해 본 일도 없습니다. 그저 부모가 준 세상에서 부모가 주는 사랑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만약 그것이 가시 돋친 비난과 차가운 회초리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한 연구에서는 설령 부모가 어떤 연유로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아이의 곁에 안정적인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아이의 삶의 궤적이 크게 달라짐을 밝혀냈습니다. 제인 에어가 그러했듯이 힘든 어린 시절을 지내왔던 한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도 햇살처럼 환한 때가 있었다”고 회상할 수 있도록, 우리도 누군가에겐는 좋은 어른이 돼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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