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나 혼자만 뒤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다들 저 앞으로 힘차게 달려 나가는데 나는 제자리를 빙빙 도는 것만 같을 때 말입니다.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보면 붉은 여왕이 나오죠.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는 모두들 열심히 달리고 있습니다. 그걸 이상하게 여긴 앨리스가 그 이유를 묻자 “여기서는 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달려야 한다, 어디론가 가고 싶으면 두 배로 달려야 한다”는 답을 듣습니다. 다른 사람들, 그리고 세상이 너무나 빨리 변한다면 그냥 잠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크게 뒤쳐지게 됩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이제 정말 초단위로 바뀝니다.
정보 통신 기술로 세상은 하나로 묶였고, 예전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하루는 지나야 알까 말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거의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소식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유행도 국지적으로 발생하고 또 사그라졌지만, 네트워크를 통한 유행의 확산 속도 역시 초단위여서 이제는 전 세계의 또래들은 거의 동일한 유행을 따라하고, 거의 동일한 컨텐츠를 소비하고, 거의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전처럼 로컬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모두 글로벌합니다. IT가 시간, 공간적 경계를 모두 지워버렸기 때문이겠지요.
빠른 변화와 역동성은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만큼 빨리 발전한다는 뜻일 수도 있고, 또 그만큼 새로운 기회가 많이 생긴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고, 잘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게 매우 어렵다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만, 과거처럼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완전히 운명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니 그나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러나 빠른 속도는 일부 매우 기능이 높은 사람들만 적응할 수 있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다 시류를 읽고, 변화를 감지하고, 거기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범용 기술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입장벽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며, 기술 친화적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사용 자체가 매우 어려운 것이 되기도 합니다. 당연히 접근과 사용에 대한 비용 역시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일반적인 사용 수준까지 이르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능할지 모르나 그것을 이용해서 기회를 찾고 경제적 성과를 내는 수준에 이르는 것은 또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세상은 원래 붉은 여왕의 나라입니다. 누구나 열심히 달리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주 오랜 과거에는 진화의 압력이 그런 식으로 우리의 등을 떠밀었고, 지금은 자본주의적 체제의 압력이 우리를 더 적극적으로, 더 진취적으로, 더 공격적으로 살라고 종용, 혹은 강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넌 반드시 뒤처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우리의 불안을 자극합니다. 자산 가격은 너무나 많이 상승해서 이제는 근로 소득으로 특정 자산, 아마 집이겠지요, 을 취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더 불안해집니다. “난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집 한 채도 갖지 못하는 것일까”하는 걱정은 우리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조급하게 만들고, 그래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게 하기도 합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남들이 무엇을 하는지 우리가 다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무슨 차를 타고 어떤 집에 사는지 알 방도가 거의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지금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큐레이팅해서 전시할 수 있게 됐고, 우리는 그것에 무한대로 접근 가능합니다. 몰랐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들을 알게 됨으로써 생기는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지요. 보거나 알게 되면 그것은 의식에 들어오고, 우리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거기 핀라이트를 때려 붓는 순간 우리는 자신과 그들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 괴로워집니다. “난 지금까지 뭘 했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던 내 삶이 갑자기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했던 노력들이 모두 허사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비합리적 투자를 하게 되기도 하고, 실패를 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흐름은 우리의 삶을 갈수록 더 힘들게 만듭니다.
사람마다 속도가 다릅니다. 페이스가 다르고, 템포가 다릅니다.
분명 세상에는 사회적 시계가 존재합니다. 몇 살 정도가 되면 뭘 해야 하고, 몇 살 즈음에는 어떤 자산을 취득해야 하고, 몇 살이 되면 그땐 어떤 과업을 달성해야 한다는 사회 문화적 규율이 존재합니다. 분명 개인은 그것에 저항할 수 있지만 그다지 쉽진 않으며, 연대기적 형태의 인생 과업을 더 빠르게 깨부수고 나가는 사람이 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사회적 평가 역시 쉽게 달라지진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분명 아니지요. 결국 사람은 자신만의 속도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남들이 무엇을 하든 나는 나만의 걸음으로 인생이란 여정을 걸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갑자기 페이스와 템포를 바꿨다가 탈이 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자신의 모습을 잘 모르고, 그것을 갑자기 바꾸려고 하면 결국 자기 자신을 잃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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