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람과 장기적이고도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의 좋은 모습을 좋아해 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니 서로에게 마음이 들지 않는 부분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주는 것입니다.
관계를 시작할 때는 서로의 좋은 모습만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에 빠질 리가 없겠죠.
처음 만날 때부터 서로의 단점이 보인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한눈에 반한 가능성이 거의 없음과 동의어입니다. 첫눈에 반할 때, 우리는 많은 경우 나의 바람을 상대에게 투영합니다. 상대의 실제 모습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보고 싶은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서 억지로 찾아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게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이때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맹목적으로 상대에게 빠져듭니다.
이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과학적 설명이 가능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연애 초기에는 자기 참조 활동과 관련된 뇌 부위인 후방 대상 피질(posterior cingulate cortex)이 활성화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시기에 연애 상대와 관련되어서 하는 많은 활동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며, 상대 위주라기보다 나 위주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상하셨듯 이 시기에는 도파민 활성이 매우 증가합니다.
도파민은 쾌락 분자라고 불리는 동시에 기대감 분자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두 가지에 모두 관여할 것 같기도 합니다. 즉 높은 도파민은 활성은 우리에게 고양된 기분을 가져다주는데, 특히 한껏 활성화된 자기 참조 부위, 후방 대상 피질의 지원 사격을 받은 우리의 기대가 상대에 의해서 충족될 때, 혹은 충족된다는 착각에 빠질 때 더욱 우리는 높은 곳으로 둥둥 띄워 올립니다.
반면 이 시기에는 세로토닌은 조금 줄어든다고들 합니다.
세로토닌이 줄어들면 우울장애가 발생한다고 하기도 하는데 - 하지만 세로토닌과 우울장애와의 관련성은 이 정도로 단순하진 않으며 여전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 이것은 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로토닌의 농도, 혹은 활성이 저하되는 것으로 알려진 또 다른 정신장애가 바로 강박장애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소 논리적입니다. 상대방의 사소한 것들까지 세세하게 기억하고 그 요구를 맞추려면 - 사실은 나의 요구의 반영일지도 모르지만 - 강박적인 성향이 필요할 수 있으니까요. 약간 억지스럽긴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그 이유가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과도해지면 상대방에 대한 병적 집착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더러 볼 수 있으니 더욱더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세상이 장밋빛으로 보이는 시기는 반드시 지나갑니다. 사방에 자욱했던 도파민 안개가 걷히고 그에 따라 상대에 대한 기대도 서서히 현실적인 수준으로까지 낮아집니다. 자기 참조를 담당하던 후방 대상 피질도 더 이상 예전처럼 요동치지 않습니다. 연애 초기에는 자기 참조가 극에 달하며 모든 사건과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사랑 - 사실은 나의 사랑 - 을 이루어지게 하게 위해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었습니다. 그러나 후방 대상 피질이 꺼지면 우린 그 착각에서 빠져나옵니다. 도파민 활성도 같이 줄어드니 한껏 고양되었던 기분도 같이 사라집니다. 눈에 씌었던 콩깍지가 벗겨지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추락하게 되고, 판타지 원리가 아니라 현실 원리가 작동합니다. 상대의 단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스스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내가 저렇게 큰 단점을 보지 못했을까?”
우리는 대상을 보고, 그 대상에 대해서 판단할 때 그 대상이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매우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대상을 볼 때 촉발되는 감정의 질감이 완전히 변하면 우린 그때 그 대상에 대해서 ‘낯설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이 매우 극단적으로 나타는 경우가 캡그래스 증후군(카프그라스 증후군)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가족이 가족이 아니라 가족으로 위장한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믿는 것인데, 이 증상을 설명하는 방식 중 하나가 가족으로부터 느껴지는 감정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모종의 이유로 얼굴을 식별한 뒤 감정을 촉발시키는 회로가 정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연애 초기와 연애 권태기에도 비슷한 논리가 작동합니다. 그 사람이 마치 다른 사람 같이 느껴지는 것이지요. 왜일까요? 그 사람으로 인해 내 안에서 불러일으켜지는 감정 자체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서 보이는 수많은 단점들을 점점 견디기 어려워짐에 따라 분홍빛이었던 감정은 더욱더 짙은 무채색으로 변해가고 상대방은 더욱더 낯설어지며 관계를 견디는 것은 갈수록 더 힘들어집니다.
장기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연애 초기에 우리가 상대에게 발견했던 장점은 실제로는 상대가 갖고 있지 않았던 장점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우리가 우리의 이상형이 갖고 있었으면 했던 특질을 상대방에게 빔프로젝터로 쏘듯 투영하고 억지로 그것을 만들어 찾아냈을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좋은 점을 계속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전략은 실패할 가능성이 꽤 높습니다. 애당초 좋은 것이 없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점으로 보이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혐오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단점은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 있기 쉽습니다. 모든 특질은 대개 정규분포를 따르니까요. 상대방의 단점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면서 그것만을 바라보면 누구도 그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저 발생할 수 있는 수준의 결핍이거나 오류이거나 실수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현실적이지요. 나에게도 그런 부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래서 상대방의 미운 점을 조금 덜 밉게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 상대방의 좋은 점을 무조건 더 좋게 봐서 다른 모든 단점까지 덮으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그렇게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안정감이라는 또 다른 좋은 감정이 찾아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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