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인간은 선언을 하는 동물입니다. 선언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 선언의 힘

RayShines 2025. 4. 8. 00:00
반응형

인간은 아마 선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일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난 OOO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그것이 될 수 있습니다.

 

 

 

존 설이라는 학자에 따르면 우리가 쓰는 언어에는  5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표상형으로 어떤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주장과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지시형으로 누군가에게 명령을 할 때를 말합니다. 세 번째는 언약형으로 누군가와 약속을 할 때 쓰입니다. 정반대로 위협을 할 때도 쓰일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표현형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누군가에게 전달할 때 사용됩니다. 다섯 번째는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선언형입니다.

 

 

 

선언은 순전히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허구의 그 무엇인가를 다른 누군가의 상상 속으로도 이식하는 적극적인 과정이며 일종의 주장입니다.

선언이 이루어지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키거나,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을 평범한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변신시킬 수 있습니다. 즉 선언은 표상이나 표현처럼 무엇인가를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무엇이나 새로운 상황을 말 그대로 만들어냅니다.

 

독립선언문 같은 글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언문이 낭독되기 전까지 다른 국가나 체제에 종속되어 있던 집단이 선언이 공표되는 순간 독립된 실체로 거듭난다는 것이지요. 법적 판결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판사가 판결문을 읽기 전까지는 피의자였던 사람은 무죄 판결을 받으면 다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고,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 순간부터 범법자가 됩니다. 지금은 없는 국가이지만 예전에는 소비에트 연방, 줄여서 소련이라고 불리던 국가가 있었습니다. 소련은 1991년 12월 8일 오후 2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지도자들이 모여 벨라베자 조약에 서명한 뒤 “소련은 이제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마법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선언을 마법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타노스의 핑거 스냅처럼 순식간에 세상을 바꾸고, 아이언맨의 핑거 스냅처럼 세상을 다시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요. 이처럼 선언의 힘은 엄청난 것입니다.

 

 

 

지금은 선언의 시대입니다.

선언이 통하려면 많은 이들이 거기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선언을 하는 주체와 선언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상호 간에 주관적 경험과 관념이 공유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언은 그냥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겠지요. 예전에는 개인이 선언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인터넷 통신 기술 덕에 개개인이 모두 1인 채널의 소유자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고, 무엇인가를 선언할 수 있습니다. 내 개인 채널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가상의 공간에 가서 외치면 됩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여러 번 포스팅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는 누구나 선언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독립을, 내 정체성을, 나의 지향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언에는 분명히 책임이 따릅니다.

난 이제부터 OOO라고 선언한다면 그 정체성에 걸맞는 언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만약 그 선언이 그저 자신의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사람들은 그것을 선언이라고 보지 않고 합리화, 시쳇말로 핑계로 치부합니다. 그리고 선언자가 자신의 부족함을 선언으로 덮으려 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우선 경험과 학습, 그리고 숙고와 천착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찾아나가는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정반대로 명확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난 저것 같다고 생각되는 직관을 완전히 믿고, 그것을 일단 선언한 뒤 그것에 맞춰 자신의 삶을 배열해 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둘 다 일장 일단이 있을 것일 테니까요.

 

요즘은 유행하는 말들이 참 많습니다. 어떤 약자로 라이프 스타일을 규정하기도 하고, 영문자로 자신의 성격을 표현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떠돌아다니는 몇몇 단어들을 가지고 와서 자신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난 OOOO야”라고 말입니다. 이는 아주 간단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유행하는 말을 가져다 쓰면 상대를 설득해야 할 필요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행하는 용어들을 쓰지 않는 것이 뒤쳐진다고 보니까요. 그러나 어쩌면 내가 누구인가는 유행하는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거나, 영문자 조합으로 선언할 수 없는 것일지 모릅니다. 나에 대해서 알아나가는 과정은 나다운 것을 단단히 해나가는 과정인 동시에, 나답지 않은 것을 서서히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니까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