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랜덤박스라는 것이 유행하는 것 같습니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상자, 그 자체로 뭔가 우리의 기대감을 부풀리지요.
우리는 랜덤, 즉 무작위에는 속임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작위 복권의 당첨 번호를 맞춘 사람이 거액의 당첨금을 받는 것에 대해서 모두가 수긍하는 것은 그 과정이 말 그대로 무작위이며, 그 과정에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 결과는 공평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기 외력이 작용한다면 그것은 무작위가 아니며, 무작위가 아니라면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을 누구나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매우 훌륭한 외모, 엄청난 지능, 압도적인 운동 능력을 타고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 역시 용인합니다. 그 과정이 무작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특정한 재능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계도 있긴 하지만 산발적으로 엄청난 재능이 태어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어떤 특정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길 바라면서 의도적으로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과를 보장할 순 없으므로, 우리는 산발적으로 태어나는 압도적 재능에 대해서도 충분히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혹시 나에게도 있었을, 혹시 나의 아이에게도 있을지 모르는 좋은 재능 역시 사회적으로 거부당할 테니까요. 우리는 그것이 무작위라면, 그 결과를 얼마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상품을 샀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사실 받아들이기 어렵기도 합니다. 아이돌의 앨범 안에 누구의 사진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거나, 내가 산 피규어 박스 안에 어떤 캐릭터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거나, 내가 산 빵의 맛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그것은 내가 지불한 돈의 가치를 최대화하는 합리적 방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요새는 이런 랜덤 아이템에 대해서 사람들이 훨씬 더 관대해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일종의 유흥이 되기도 한 것 같고요.
우리의 삶은 사실 통제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내 딴에는 내 삶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완전히 무작위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유명인들의 인터뷰에서 자주 나오는 질문이 “왜 이 일을 택하셨냐” 같은 류의 질문이지요. 그런 질문을 주고받는 것을 보면 저 역시도 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선택했는지 자문해 볼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런데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찾긴 하지만 실제로는 저도 제가 왜 지금 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을 때가 많습니다. 그저 여러 선택들의 연쇄의 결과로 일어난 일인 것 같은데, 그 과정이 모두 의도적이었다고 보기가 난감한 부분들이 있는 것이지요. 무작위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작위적 요소가 없다고도 보기 어려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이 무작위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도 그러합니다. 분명히 나의 노력과 결정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기여분도 상당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무작위적 요소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나 무작위적 요소를 0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랜덤 아이템이 우리의 삶에 유흥이 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유행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무작위적 성분을 그것에 가능한 한 많이 부여한 뒤 내 삶에 정말 중요한 것들로부터는 무작위적 요소를 가능한 한 제거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만약 무작위적 요소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이것이 공허한 바람이라는 것을 알아도 말입니다.
그리고 무작위는 우리의 삶에서 책임을 증발시켜 줍니다.
내가 산 로또가 낙첨인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사소하고 중대한 결정의 연속인 우리의 삶에서 무작위를 통한 결정은 우리 어깨에서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벗겨내주는 아주 좋은 도구인 동시에, 좋은 핑계가 될 수 있습니다. 동전을 던져서 중대사를 결정했다던 누군가처럼 말입니다. 내가 결정한 게 아니야, 그저 난 동전을 던졌을 뿐. 어떤 안 좋은 일이 발생하면 그 사람의 과거 행적을 모두 조사하여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는 일이 흔치 않은 지금의 시대는 말 그대로 무한 책임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책임감은 더 희소한 자원이 되었고, 동시에 매우 리스크 높은 베팅이 되었습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무작위를 통한 결정이겠죠. 그래서 어쩌면 랜덤 아이템이 유행하는 것은 그런 시대상의 반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작위이든 작위이든 삶은 고고히 흘러갑니다. 내가 내 삶을 살아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인식적 착각이라고 하더라도 그 편이 나의 정신 건강에는 더 좋을지 모릅니다. 내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내 주변의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분명하니 말입니다.
'조금 깊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에게는 적대시할 대상이 필요한가 봅니다. (262) | 2025.04.15 |
---|---|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함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이유가 주어지면 어떤 부당함이라도 견뎌냅니다. (301) | 2025.04.12 |
인간은 선언을 하는 동물입니다. 선언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 선언의 힘 (356) | 2025.04.08 |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재검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 의미 부여 중단 규칙 (322) | 2025.04.03 |
사랑하는 이와의 장기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운 것을 덜 밉게 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 장기 연애 | 도파민 | 세로토닌 (392) | 2025.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