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기본적으로 대항할 그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적대할 대상은 나를 규정하고, 집단을 규합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니까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두 명까진 괜찮지만 세 명이 만나면 바로 2명과 1명으로 갈라지는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다 같이 잘 지내면 참으로 좋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며 결과가 나오는 것은 생각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와 그들,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눕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인 과정이어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지도 깨닫지조차 못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원밖에 있는 사람들은 편애하고, 원밖에 있는 사람들은 악마화하고 있죠. 사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원밖에 사람들이 나와 우리 편에게 가할지도 모르는 위해로부터 나와 우리 편을 지켜내기 위해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까요. 불안과 두려움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입니다.
냉전 시대에는 전 세계가 둘로 나뉘어 서로를 적대시했습니다.
적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누가 적인지 찾아 나설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적을 찾으려는 행동 자체가 불경한 행동에 가까웠죠. 거대한 적을 무찌르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하는데 딴짓을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때는 영화를 보면 비슷한 플롯을 가진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특정 국가는 악으로 표현되고, 우리 편은 그 악으로부터 세상을 지켜내는 영웅이었죠. 그것이 너무도 당연했기 때문에 우리 편은 당연히 선이었고, 선이 이기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선과 악이 불분명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그때는 아마 제작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서 머리를 식히고 싶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냉전은 종식됐고, 이제는 적국과 동맹국 사이의 경계가 매우 모호해졌습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경제적 이득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이념과 교역은 엄연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중국이나 소련에서 할 정책들이 미국에서 나오기도 하고, 예전 같으면 미국이 토로했을 불만을 중국 정부가 쏟아내기도 하지요. 지금은 거대한 적이 없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피아식별부터 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SNS라는 강력한 도구도 있습니다. 예전 냉전 시대에는 이런 도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의 프로파간다가 더 중요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체가 전체를 대상으로 함성을 지를 수 있는 도구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강력한 도구가 있으면 사용하는 것이 이치입니다. 국가 차원에서의 적이 없다면, 우리는 억지로라도 적대시할 대상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어떤 누구라도 괜찮습니다. 연예인일 수도 있고, 특정 직역일 수도 있고, 특정 지역에서 낳고 자란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대척점을 설정함으로써 우리를 규정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대상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매우 세밀하게 개인화된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개인, 그리고 소규모 집단들이 적대시할 수 있는 적대자 역시 매우 촘촘하게 설정됩니다. 그리고 매분 매초 적대자들과의 언쟁이, 혹은 전투가, 혹은 성전이 계속됩니다. 계속해서 싸우며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이 더 공고해짐을 느낍니다. 우리의 적대자들이 우리를 더 우리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우리의 적대자가 힘을 잃으면 우리는 승리감에 도취되지만 이내 새로운 적대자를 찾아 나섭니다. 적대자가 없으면 집단이 응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토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피아식별이 최우선 과제가 된 것처럼 보이는 논쟁들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누구나 어떤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우리 집단에 대한 위협으로 느끼는 것이 온당한지도 우려될 때가 많습니다. 끊임없이 적대자를 생산해내는 것 말고는 유지될 수 없는 집단이라면 존재 이유와 작동 방식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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