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개념에 대한 단어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개념에 이름을 붙이는 것에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언어학자 아나톨 슈테파노비치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명사로 지칭할 때 그것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수반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즉 우리가 무엇엔가 이름을 붙이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우리의 인식 속에서 다룰 수 있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명사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와 같은 무게를 지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이름을 붙여 문장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마치 실재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것이 당위라고 생각하는 것에 있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아주 좋은 예가 인종 race 이라는 단어입니다. 실제로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단일 종임이 밝혀진 지 오래됐습니다. 지금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죠. 만약 인종이라는 것이 분류학적 개념이라면 흑인종, 백인종, 황인종에게 모두 다른 종명이 붙어야 옳을 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종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 미미하여 혹자는 인종 간의 차이는 인간과 펭귄 간의 차이보다 적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종은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며 사회적, 혹은 정치적 개념에 더 가깝지만 우리는 인종이라는 표현을 너무 쉽게 쓰고 있으며 -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 인종이라는 것이 확실한 과학적 근거를 가진 생물학적 개념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예가 바로 살색, 피부색이라는 표현입니다. 아주 예전에는 크레파스에 살색이라는 색깔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아마도 살구색이라는 표현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 지금도 살색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약간 밝은 베이지색과 분홍색 사이 어디쯤 되는 색깔이 떠오릅니다.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평균을 내보면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살구색을 살색이라고 표현한 것은 백인 위주의 세계관인 것이지요. 또한 어떤 특정한 색을 살색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색깔 외의 피부는 주류가 아닌 것, 혹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일방적으로 분류해 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폄하하게 되는 결과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삶에 침투한 단어들이 정말 많을 것입니다. 같은 개념이라도 어떤 단어로 표현하느냐가 중요해지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두 정치 세력이 단어를 선점하기 위해 첨예한 대립을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말을 하고, 쓰고, 치고, 읽기 때문에 그것을 마치 산소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잊을 때가 많습니다. 입버릇처럼 하는 내가 내뱉는 말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내 귀에 들림으로써 나에게 미치는 영향들, 내가 나도 모르게 내 자신에게 머릿속으로 하는 이야기들, 남들에게 내가 하고 그 사람의 내부를 거쳐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나의 말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하는 말을 잘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 부정적인 말들만 하고 있는 건 아닐지, 내가 내 마음대로 어떤 개념을 왜곡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내가 너무 무비판적으로 세상에 유행하는 말들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인터넷에서는 누군가를 잘 긁는 것, 잘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 누군가에게 상처를 잘 주고 약점을 잘 건드리는 것이 유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우리 인간은 말로써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없는 것을 만든 뒤 그것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다룰 수조차 있습니다. 그럴진대 안 좋은 말들을 골라서 사용하고, 조롱과 혐오로 꽉 찬 문장들을 쓰고 말한 뒤, 그것을 다시 읽고 듣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일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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