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함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이유가 주어지면 어떤 부당함이라도 견뎌냅니다.

RayShines 2025. 4. 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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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함”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유만 주어지면 그 어떤 부당함도 견뎌내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평등합니다.

모든 인간에는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의식주 환경은 조성이 되어야 하며,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타고난 것 때문에 차별받지 말아야 합니다. 아마 우리 모두는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을 것이며,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생각을 밖으로 주장하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 명제를 믿고 있기 때문에, 혹은 적어도 믿고 있다고 겉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그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했다가는 파시스트로 낙인찍혀 사회생활이 어려울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유와 평등을 믿습니다, 아니 최소한 믿는 척이라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세상은 부당합니다.

공정한 경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고, 좋은 조건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이 좋지 않은 조건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삶을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다들 말은 하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게 특정 피부색이나 종교를 가진 사람들, 특정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한 강력한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과 실제 세상의 모습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 그러니까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위에서 말한 부당함의 여러 사례들 중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피부색은 개인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같은 종교를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생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특정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모두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성급한 일반화 오류의 대표격이지요.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당함에 해당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부당함은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당함을 이용하려는 사람들, 혹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것을 이유 있는 부당함으로 만들기 위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서사를 짜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그런 서사에 해당합니다.

특정 인종 - 인종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면 말입니다, 인종은 생물학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임이 이미 밝혀졌지만 우리는 인종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합니다 - 의 천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일부 사례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수한 반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지요. 특정 지역을 언급하면서는 역사적 사건을 그 이유로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적 사건에 기록되지 않았던 사건들이 무수히 많고, 기록되지 않은 무수한 사건들과 관련이 있는 무수한 개인들의 개인적인 역사와 생각들은 전혀 무시한 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이 대해 부당하다고 느낄 때 누군가가 그 부당함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제시해주면 그때부터는 아무 이유 없던 부당함이 어떤 근거와 스토리텔링을 가지는 부당함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부당함을 견딜 수 있게 됩니다. 가령 예를 들어 과거 중세 유럽에 핍박받고 착취 당하던 평민들이 삶에 대해 느끼는 부당함을 해소해 준 내러티브는 내세에 가면 그 모든 것을 보상받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양반과 평민 사이의 위계질서를 강제하기 위해 사용했던 이야기 중 한 가지는 군사부일체, 즉  군주, 스승, 아버지는 모두 같은 것이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러티브는 긴밀하게 짜여진 소공동체 내에서도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누구나 그 룰을 따라야 했습니다. 여기서 좀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당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을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제조해 낸다는 것이지요. 즉 이것은 일종의 통치이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 중 하나로 이야기를 퍼뜨린 것이겠지요.

 

어느 시대에나 이야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야기는 그것이 옳고 그름이나, 참/거짓과 무관하게 사실이 됩니다. 이야기가 힘을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신뢰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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