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재검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 의미 부여 중단 규칙

RayShines 2025. 4. 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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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마음”, “바른 행복”, “불안 세대” 등의 저자인 조너선 하이트가 이야기한 “의미 부여 중단 규칙”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 뇌는 어떤 상황에 대해서 한번 무의식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낸 이후에는 그 이야기가 옳은지 그른지를 다시 한번 살펴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음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우리의 뇌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마구마구 만들어내는 데 매우 특화되어 있는 기관입니다. 

자체로 매우 강력한 이야기꾼, 즉 스토리텔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이 매우 빠르게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에 대해 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은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에서 흥미롭게 설명합니다. 두 저자는 우리의 뇌를 고층빌딩에 비유합니다. 각 층은 각자 특정한 정보를 처리하는 특정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맨 꼭대기 층에는 우리 자신이 앉아 있습니다. 조금 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우리의 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정보가 빌딩 현관과 리셉션 데스크를 통과하여 여러 층을 거치며 처리되어 꼭대기 층, 즉 의식까지 도달하면 우리는 그것을 감지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어떤 정보가 우리의 뇌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의식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생각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는 1층과 꼭대기 층 사이의 어딘가를 맴돌다 유실, 혹은 저장됩니다. 그런데 신체의 내부, 외부에서 발생하는 감각정보가 들어오는 1층 리셉션 데스크와 꼭대기 층 사이에는 핫라인, 즉 직통전화가 없습니다. 감각정보가 의식까지 도달을 하려면 그 사이의 수많은 층을 거치며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꼭대기층보다 낮은 층들은 우리의 의식 아래, 즉 무의식의 영역이므로 우리가 감지하거나 다룰 수 없습니다. 낮은 층에서 이루어지는 정보의 흐름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자극이나 정보가 주어지면 그것들은 낮은 층들 사이를 오가며 처리되고 순식간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무작위로 벌어진 사건들 사이의 전후 관계를 파악하고, 거기에 인과 관계를 부여해서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렇게 처음의 정보와는 조금, 혹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가공된 새로운 버전의 정보는 이야기라는 형태로 패키징되어 의식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후공정과 패키징까지 거친 하나의 내러티브, 즉 서사를 우리의 뇌는 일종의 완제품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의 품질에 대해서 의심해 볼 생각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의 품질을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합니다. 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신체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의 20%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기관으로, 비유하자면 연비가 형편없이 떨어지지는 고배기량의 엔진입니다. 게다가 뇌는 아무 연료나 사용하지 않고 당만을 사용하는, 역시 엔진에 비유하자면 고급유만 넣어야 하는 사치스러운 기관이기도 합니다. 진화적 압력은 뇌가 동면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늘 전체 에너지 소모량의 20% 정도를 소모할 정도로 늘 주변을 살피고 감지하고 정보 처리를 하도록 밀어붙였고, 그 결과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율은 매우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이 과정들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게 만들었고, 한 번 처리된 것을 재검토하는 일은 줄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도록 해서 의식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려는 과정을 최대한 줄여서 인지적 부하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신속한 반응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막강한 장점을 가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완제품의 형태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배송되는 서사에 그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게 만든다는 단점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을 조너선 하이트는 “의미 부여 중단 규칙”이라는 말로 비꼰 것이지요.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엄격히는 나의 뇌가 만든 이야기를 의심해 보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낭비이기 때문이지요. 의심은 매우 피로한 일입니다. 타인에 대한 의심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의심 역시 말입니다. 생각을 재검토하는 일은 매우 큰 인지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고, 이는 결국 에너지를 동원해야 하는 일이므로 안 그래도 효율이 떨어지는 뇌의 연비를 더 떨어뜨립니다.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려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애써 - 사실 본인은 애썼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집니다만 - 만든 이야기를 폐기하라는 동기를 부여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 이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빠른 속도로 정보를 처리하고 거기서 이야기를 추출해 낼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매우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해왔기 때문입니다. 자동화된 처리 과정을 통해 입력이 들어가면 곧장 출력이 나오도록 오랜 기간 매끄럽게 닦인 수로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수로의 입구로 물이 흘러 들어가면 그 물은 잘 닦여지지 않아 바닥이 높은 수로 대신 잘 닦여져 바닥이 낮아진 수로로 순식간에 흐르고 늘 같은 저수지로 흘러 들어갑니다. 새로운 저수지, 즉 새로운 결론에 도달하려면 수로를 새로 닦아야 하는데 누구도 그럴 용의가 없습니다. 그것은 기존의 수로, 즉 늘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나라는 사람을 대표하는 저수지로 물을 흐르게 해 주었던 그 수로를 폐기하고 새로운 수로를 만들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라는 말과 거의 동일합니다. 그래서 웬만한 자극이나 설득으로는 누군가에게 이 정도의 동기를 부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말이 인간이 절대 변화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구나 변화할 여지가 있으며, 누구에게나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다만 외부의 강제로 그것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변화 필요성에 대한 요구가 강력하게 발생한다면,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기존과는 다른 입력을 넣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매우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차근차근 우리의 삶은 변화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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