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든 생각

영화 "보통의 가족" | 영화 "더 디너 The Dinner" | 헤르만 코흐

RayShines 2025. 5. 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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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를 원작으로 하는 우리 영화 “보통의 가족”과 이탈리아 영화 “더 디너”를 보고 써보는 감상기입니다. 스포일러가 매우 많으니 영화나 책을 보실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헤르만 코흐는 네덜란드에서는 매우 유명한 작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디너”라는 소설은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까지 영화화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2013년, 이탈리아에서는 2014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2024년에 공개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판의 감독은 어떻게 사랑이 변하느냐던 허진호 감독이고, 설경구, 김희애, 장동건, 수현이 주연을 맡았습니다.

 

 

 

영화의 기본적 스토리는 두 영화 모두 동일합니다.

형은 변호사, 동생은 의사입니다. 형은 재혼을 했고, 늦둥이가 한 명 있고, 전처와의 사이에 딸을 두고 있으며, 동생에게는 또래의 아들이 있습니다. 형의 딸과 동생의 아들은 같은 학교에 다닙니다. 두 형제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자리를 갖습니다. 사건은 두 부부가 식사를 하던 날 밤에 벌어집니다. 두 부부의 두 아이는 파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숙자를 구타한 뒤 길에 방치하여 사망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CCTV에 고스란히 찍히고, 이탈리아 버전에서는 TV 프로그램에, 우리나라에서는 동영상 플랫폼에 올라갑니다.

 

 

 

두 영화에서 모두 형은 성취 지향적인 변호사로 그려지고, 그에 반해 동생은 매우 인간적인 소아과 의사로 그려집니다.

이탈리아 판에서 형은 위협 운전을 한 상대방을 우발적으로 총으로 쏴 죽인 경찰을 변호하는데, 이것을 가지고도 동생은 형을 쓰레기라고 표현합니다. 허진호 감독이 보기에도 이 정도로는 좀 약하다고 생각했는지 “보통의 가족”에서의 형은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위협 운전을 하다 상대방을 일부러 치어 죽인 재벌집 셋째 아들을 변호합니다. 이것을 두고 동생을 연기하는 동생은 “정말 돈 되면 다 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두 형제의 대비가 약하다고 느꼈는지, “보통의 가족”에서 동생은 자기 아들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 노모를 평범한 아파트에 모시고 있고, 동생 내외는 아프리카로 봉사 활동을 하러 다니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 변호사로 성공한 형은 나이 어리고 엄청난 미인인 여인과 결혼해서 으리으리한 집에 살고 벤틀리를 몰고 다닙니다.

 

 

 

결국 두 아이가 노숙자를 살해한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두고 두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평소 두 인물이 살아온 성향을 보자면 형은 문제를 냉정하게 평가해서 은폐하려고 할 것 같고, 동생 쪽은 사람이 죽었으니 그냥 덮어둘 문제가 아니라며 처벌을 받는 쪽을 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극에서는 정반대입니다. 결정적 계기는 두 아이가 사망한 노숙자를 조롱하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베이비 모니터를 통해서 형이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화를 듣고 아이들이 전혀 뉘우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형은 두 아이들이 처벌을 받아야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탈리아 판에서는 이 대화를 형만 듣고 동생 내외에게 이야기해 주지만, “보통의 가족”에서는 형이 이 대화를 다운로드 받았는지 동생 부부에게도 스마트폰으로 들려줍니다. 어쨌든 두 영화에서 모두 두 부부가 모두 아이들의 도덕성에 심각한 공백이 있고,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 어쩌면 악의적으로 노숙자를 때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형은 딸을 자수시키겠고 선언합니다. "아이들이 내가 늘 그랬듯 이걸 덮어줄 개자식 - 이 대사는 이탈리아 판에만 나옵니다 - 으로 본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마치 지금까지 악인들을 변호하며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아이들이 일말의 반성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자기 아들이 자신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아빠 같은 의사가 될게”라고 말하며 우는 것 - 이 장면은 “보통의 가족”에만 있습니다  - 이 모두 연기였음을 알게 된 이후에도 자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소설을 압축하다 보니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소설에서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두 영화에서 두 형제의 이 급진적 변화가 그다지 설득력이 높지 않습니다. 동생은 왜 형이 모든 것을 결정하려고 하느냐, 형이 뭔데 내 아들 인생을 마음대로 하느냐며, 자신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듯한 형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통의 가족”에서는 두 형제가 모두 아버지의 체벌, 혹은 가정 폭력에 시달렸던 것 같은 내용이 치매 노모의 입을 통해서 살짝 흘러나오기도 하고, 이것이 어쩌면 동생이 권위에 대해 가지는 반감이라든지, 얻어맞지 않기 위해 늘 좋은 사람으로 보이며 살아야 한다는 과도한 도덕적 경직성,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는 그 무엇보다도 자기 보호와 생존이 더 중요하다는 위선적 결정에 대한 설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판에서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긴 합니다. 소설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동생은 아이들을 자수시키겠다는 형에게 “그러면 죽여버리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동생은 레스토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을 차로 치어 버리며 영화가 끝납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중 하나가 건조하고 도발적인 생물학적 표현으로는 번식, 조금 더 고상한 표현으로는 사랑을 통해 아이를 낳고 키워나가는 과정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아마도 생존과 번식이 먼저였을 것이고 그다음에 정의, 도덕 윤리, 선과 같은 개념들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먼저 생겨난 것이 무조건 더 옳은 것은 아닐 테지만, 먼저 생겨난 것이 더 오래 우리의 정신과 행동을 지배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과연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에 대해서 한 번 정도 의문을 가지게 되지요. 두 영화에서 모두 피해자는 노숙자입니다. 두 아이들은 꽤 좋은 배경을 갖고 있지요. 딸 쪽은 성공한 변호사인 아버지를 두고 있고, 아들 쪽은 헌신적인 의사 아버지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디너”에서는 “두 아이 다 배경이 나쁘지 않아서 정상 참작이 더 될 것 같다”는 취지의 대사가 나오기도 합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변호사, 의사인 것에 아이들이 기여한 것은 사실 전혀 없는데 그것이 아이들의 삶에는 모종의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동서양 모두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에 반해 그런 배경을 갖추고 있지 못한 노숙자는 그 자체로 큰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적어도 이 영화들에서는 말입니다.

 

 

 

아이들을 자수시키느냐, 아니면 아무도 모를 가능성이 크니 그냥 없던 일로 하느냐 중에 어떤 선택이 옳으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수를 하고 벌을 받아야겠지요. 그러나 성인이라면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인간들이라면 당연히 선을 택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항상 선을 택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부모라면 선뜻 이 결정을 내리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살인자라는 낙인을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의 미래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니까요. “보통의 가족”에서 아들의 엄마는 말합니다. “그 노숙자 겨울에 얼어 죽었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절규하며 외칩니다. “당신(동생)이 살린 아이가 몇 명이고, 우리는 봉사도 계속 해왔으니 이래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선을 미리 쌓아둔 뒤 나 아이가 한 악행을 저축해 둔 선행으로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까요. 사회적으로 규탄을 받는 이들을 변호해서 호사스러운 살아왔던 형을, 소아 환자들을 살리는 데 일생을 바쳐온 동생이 살해합니다. 그렇다면 이 동생의 죄는 지금까지 살린 환자들의 목숨의 가치만큼 감해지는 것이고, 형은 그의 삶을 생각해 봤을 때 죽어 마땅한 것일까요. 뭐가 답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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