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설을 보고 써보는 감상기입니다. 스포일러가 매우 많으니 주의해 주세요.
우연히 영화 청설을 보게 되었습니다. 원작은 2009년도 대만에서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입니다. 청설을 한자로 聽說로 쓰더군요. 중국어는 전혀 모르지만 말을 듣는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청각장애인임을 고려한다면 역설적인 제목이기도 합니다.
청설의 주인공은 홍경, 노윤서입니다. 남녀 주인공 모두 워낙 순수한, 그리고 하얀 얼굴을 갖고 있는 배우라서 그런지 영화 내내 펼쳐지는 초록빛 배경과 잘 어울렸습니다. 전 사실 영화 제목의 뜻을 모르고 봐서 청설의 청이 들을 청이라 아니라 푸를 청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영화 내내 스크린에 푸르름이 넘쳐납니다. 얼굴이 이미 충분히 알려진 배우들이긴 하지만 꾸며지지 않은 듯한 모습과 뭔가 수줍은듯한 미소를 보여주는 두 배우의 싱그러움도 보는 내내 기분이 좋았습니다.
영화의 기본적인 스토리는 눈속임, 혹은 귀속임 없이 단순한 직선을 그립니다.
남자 주인공의 여자 주인공에 대한 마음도 그저 직선입니다. 마치 사방으로 직진하는 소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소리는 장애물이 있으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합니다. 직진하는 주인공의 마음 역시 장애물에 부딪혀 방향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리라는 것은 매우 정직합니다. 제대로 듣기만 한다면 많은 것을 알려주지요. 그러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가 말하듯이 아무리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천지인데 못 듣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될까 싶기도 하지요, 사람만 괜찮다면 말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가족들에게 과한 책임감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러는지도 모르는 채 모두 청각장애인들인 가족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특히 수영을 하는 여동생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희생합니다. 여동생의 훈련 비용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동생을 수영장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런 그녀는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스물여섯이라는 나이가 될 때까지 말이지요. 그런 그녀에게 그녀의 여동생은 말합니다. 자신의 꿈이 왜 언니의 꿈이냐고,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주인공의 여동생은 자신이 듣지 못하는 소리처럼 직진하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인 수영을 합니다. 그녀는 듣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삶을 살길 원합니다. 그 경로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이겨낼 수 있지만, 그 원동력이 언니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길 바랍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은 일직선을 그리며 여주인공의 마음에 가서 닿습니다.
요새는 많은 영화들이 피카레스크를 표방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선악은 모호하고, 권선징악은 너무 유치하다는듯한 결말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많은 것을 맡겨둡니다. 사실 세상이 그러합니다. 악인들이 더 잘 살고, 선인들은 고단한 삶을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더 정확히는 누구에게나 선과 악이 공존하며, 그저 상황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데 그 비율에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은 명확한 흑과 백으로 나뉘지 않으며 어디든 회색이지요. 그래서 영화나 책에서라도 악인들은 벌을 받고 선인들은 상을 받길 바랐던 것이 우리의 마음이었던 것일 텐데 그것이 현실의 솔직한 반영이 아니라는 생각에 모호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피카레스크가 유행을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청설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선합니다. 나쁜 사람 하나가 나오기는 하지만 금방 지나갑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가 조금 나쁜 마음을 먹어야 영화가 진행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될 정도로 다들 착하고 느립니다. 이들의 선의는 영화 내내 스크린을 하나 가득 채우는 초록색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바람에 흩날리는 푸른 나뭇잎 사이로 빛나는 햇살처럼 눈부십니다. 선한 마음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느끼게 됐습니다. 자극적인 스토리와 이미지를 러닝 타임을 가득 채워야만 한다는 강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한 이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영화 속의 호수가처럼, 누구에게나 마음 편히 찾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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