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나를 무조건 받아들여 달라는 요구는 과연 적절한 것일까요.

RayShines 2025. 8. 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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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소규모 공동체가 매우 확고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는 공동체의 존재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더 외로워지고, 누군에겐가 혹은 어디엔가 수용되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씨족사회, 혹은 소규모 공경 사회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하는 동시에 많은 것을 강제했습니다. 소규모 공동체는 그 자체가 사회복지 시스템, 탁아 시스템, 교육 시스템, 대부 시스템, 상조 시스템이었습니다. 그 내부에서 각종 서비스가 자생적으로 발생했고, 특별한 운영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공동체의 어른의 명령, 어른들의 상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작동했습니다. 성문화된 율이 없다 보니 구전, 관행, 개인적 경함, 집단적 기억에 따라 사회가 운영됐으며,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룰들이 있어도 고치기 어려운 면이 있었고, 그런 규칙들이 하나둘 쌓여나가며 필요 이상으로 엄혹한 압제적 시스템으로 변모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은 집단을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단에 속할 수밖에 없었으며, 집단이 강요하는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어 개성이나 역량을 펼치는 것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각 개인의 개별적인 인간이었지만 대부분 동일한 삶의 궤적을 그리다가 개별적 이유로 사망해 같은 곳에 묻혔습니다. 이를 억압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집단을 이들을 추방으로 단죄하며 생존의 가능성을 0으로 수렴시켰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소규모 공동체가 나쁜 점만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소규모 공동체는 유기적으로 서로 맞물려 작동했고, 이는 개개인들에게 강력한 소속감을 주고, 결속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빡빡한 규칙에 따라 예의범절을 지키며 사는 것이 답답하긴 했을 것이지만 “내가 여기 속해있다”는 느낌을 매우 매우 강력하게 전달했고, 이는 개인의 개별적 정체성을 대체할 정도로 깊숙이 개인의 정신 내부로 침투했습니다. 정말로 내가 누군지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어디에 속해있는지는 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산업화를 거치며 소규모 공동체는 해체됐습니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어 옹기종기 모여사는 것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 일자리가 있는 도시로 향했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뒤섞이게 되며 전통적 의미의 소속감은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에게 남은 유일한 소속감 중 하나는 국가인데 이제는 물리적 국경 말고는 국가 사이의 자본이나 정보의 흐름에 거의 제한이 없어 그마저도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인인인 비건은 고기를 먹는 한국인보다 비건인 일본인과 더 잘 맞는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국적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뭘 좋아하고 선호하며, 무엇으로 자신을 규정하는지입니다. 즉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정체성은 생각보다 찾기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내가 누군지를 찾기 위해 지금도 여행 중이니까요. 아마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해하고, 더 이상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알 수 없어 방랑하고 있는 사람들도 어디엔가 수용되고 싶다는 욕구가 들 것입니다.

“이런 나라도 받아줄 곳이 있을까”하는 의문을 떨쳐내지 못한 채 탐험을 계속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수용되지 못한다는 걱정, 불안, 두려움은 가끔 우리를 잠식하고 압도합니다. 이러다가 정말 완전히 나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근원적 공포겠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일방적으로 자신에 대해서 주장하고 선언합니다. “난 이런 사람이야, 옳고 그름 따위는 없어, 그저 존재인 것이니, 너희들과 이 사회는 나를 받아들이고 수용해야만 해, 설령 그것이 집단에 피해를 끼치더라도 난 상관없어, 난 수용되지 못했고 그 자체가 나에게는 상처였으니까”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서로를 수용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 수용할 수 있는 사회가 아마 건강한 사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인의 독립적 개체로서 가진 나만의 유일한 특질을 잃지 않는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적응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타협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조건적 수용을 주장할 수는 있으나 극단적인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무분별한 용인은 결국 사회 전체를 무너뜨릴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용인될 수 있다는 말은 타인에게 의도적 피해를 끼치는 것 역시도 용인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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