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생각

서사적 자아 Narrative Self | 나는 이야기이다. | 미래의 기억 | 이야기 편향

RayShines 2025. 9. 26. 07:00
반응형

나의 자아가 이야기로, 이야기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서사적 자아 narrative self 라고 합니다.

 

 

 

서사 narrative 란 하나로 묶인 일련의 에피소드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로 묶였다는 말은 단순히 서로 아무런 관계없는 에피소드들을 무작위로 한 움큼 잡은 뒤 묶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 삶의 많은 사건들은 무작위적으로 일어납니다. 더 정확히는 그렇게 보입니다. 모든 사건에는 인과가 있는 것이 분명하겠으나, 현재 우리의 과학 기술, 혹은 우리의 인지적 능력이나 범위로는 감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들도 매우 많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의 눈에 그 사건은 무작위적 사건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럴지 모릅니다. 우리가 일식이나 월식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많은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을 때 우리는 에피소드들 사이의 이음매를 최대한 매끄럽게 가공합니다. 별 상관없어 보이는 에피소드를 연결할 때조차 우리는 그 사이에 인과관계를 억지로라도 욱여넣습니다. 그리고 그 인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이야기를 씁니다. 이때 우리는 인과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그럴듯해 보이기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씁니다. 이야기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내가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누구일지”를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쓰는 이야기는 나라는 인간을 얼마나 일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 나라는 인간의 개념에 대한 정합성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 나라는 인간을 나에게 설명함에 있어 얼마나 날 편안하게 해 주느냐, 그도 아니면 얼마나 날 덜 괴롭게 해 주느냐가 관건입니다.

 

 

 

우리는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내가 방금 전등을 껐는지, 비 소식이 있는데 출근하기 전에 창문 단속을 잘했는지 등은 단기 기억에 속합니다. 우리는 단기 기억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합니다. 그래야만 일상을 가능한 문제없이 살아나갈 수 있고, 주어진 책무를 빈틈없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 기억은 좀 다릅니다. 장기 기억은 훨씬 느슨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날조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하고, 수정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새로운 이야기를 쓸 때 우리는 새롭게 쓰는 이야기가 우리의 과거와 부합하길 원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진 장기 기억과 크게 위배되지 않아야 술술 써집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우리는 가끔 정말 나 자신답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하고, 충동적 결정을 내리기도 하며,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한 사건들이 벌어기지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야 하는 압력을 받게 되는데, 이때 장기 기억의 커다란 흐름에 너무 어긋나면 자아에 균열이 발생하는 느낌이 들 것이 분명합니다. “너무 나답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지요. 이때 우리는 적당한 타협을 합니다. 과거의 기억도 좀 리터칭 해서 장기 기억을 판올림합니다.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장기 기억 ver 8.13이 있다고 해보죠. 아마도 7번의 메이저 업데이트와 13번의 마이너 업데이트를 거친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이벤트를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도 조금 편집해 장기 기억 ver 8.13과 어울리게 사후 보정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새로운 경험은 우리의 기억을 바꾸고, 우리의 기억은 우리의 새로운 경험을 바꿉니다. 그래서 “미래의 기억”이라는 말을 합니다. 미래에 펼쳐질 일은 우리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억은 미래에도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과거에서 미래까지 하나로 이어진 이야기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것들에게까지 이야기를 만들어 덧칠하는 우리의 성향을 이야기 편향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런 성향은 하늘에 무작위로 박혀 있는 별자리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만들어낼 정도입니다.

 

 

 

서사적 자아가 허물어지면,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쓰고 있는 이야기가 허물어지면 우리도 같이 허물어집니다. 

서사적 자아는 기억에 그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억이 흐릿해지면 우리의 서사적 자아도 힘을 잃습니다. 만약 우리의 기억이 너무 어둡고 슬프다면 우리의 서사적 자아도 늘 슬픔에 빠져 어두운 이야기만 써낼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쓰고, 좋은 의견을 갖는다면 아마 우리가 미래에 쓰게 될 이야기도 조금씩 바뀔 것이고, 우리의 미래도 서서히 과거의 어두움에서 벗어날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이 바뀔 수는 없겠지만 서서히 변화할 수 있겠죠. 우리는 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이니까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