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성 진술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대화를 시작할 때 지금 이 대화의 목적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간단하고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게 그다지 간단치가 않을 때가 많고,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면 도움이 꽤나 많이 됩니다.
한 연구에서 경찰들이 관할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아무 설명 없이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봤습니다.
다른 그룹의 경찰들도 똑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그룹의 경우 “저는 RayShines 경관이라고 합니다. 우리 지역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어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시간이 괜찮으실까요?”라고 서두를 시작 했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후자 쪽이 훨씬 더 대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자의 경찰과 이야기한 시민들은 경찰들이 자신을 부르자마자 스트레스가 급격히 상승했고 대화를 빨리 끝내려고 얼버부리며 딱딱한 말투를 사용했습니다. 반면, 후자의 경찰들과 이야기를 한 시민들은 위협을 크게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느끼지 않았고 좀 더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했고 좀 더 복잡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화 시간도 전자에 비해 2배가량이었다고 합니다. 이 연구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권위적 대상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얼마나 큰 부담을 느끼는지에 대한 실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자와 같은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잠깐 내 방으로 좀 오라”든가 “있다가 할 이야기가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약속을 잡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일 수도 있겠으나 당연히 하급자들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일까 걱정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러 가게 되고, 스트레스는 급격히 상승합니다. 만약 정말 나쁜 이야기라면 “틀린 예감은 틀린 적이 없군, 이로써 저 상사를 싫어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군”으로 결론이 나게 됩니다. 그런데 좋은 이야기라면 어떨까요? 너무 기뻐서 상사의 방으로 갈 때 느꼈던 긴장이 눈 녹듯이 사라질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정말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면 “아니 이런 이야기면 미리 말을 해주면 서로 좋지 않아?”하면서 안 좋은 감정이 지속됩니다. 즉 어느 쪽이든 힘의 불균형이 명확한 상태에서 대화의 목적이 불투명한 경우 열위에 있는 사람은 그 자체가 적지 않은 스트레스가 됩니다. 따라서 “그냥 이야기 좀 하자고”라는 식의 불투명하기 그지없는 초청은 최악의 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이번 프로젝트에서 자네 역할이 불명확했던 것 같아서 거기에 대해서 좀 상의하려고 하니 내 방으로 와줄 수 있나”, “이번 프로젝트에서 자네가 역할을 톡톡히 한 것 같아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좀 오겠나” 정도로 대화에 초대하면 훨씬 더 좋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은 결국 감정에 크게 휘둘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 중 마지막 사건과 감정이 그 과정 전체에 대한 인지적 평가와 감정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시경을 오래 받았고 중간중간 통증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검사가 순조롭게 끝나면, 짧게 내시경을 받았던 환자들보다 검사 자체가 덜 고통스럽다고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사건의 마지막에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가 사건 전체에 대한 인상을 결정하게 됩니다. 위의 경우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떤 상황인지 어느 정도 예측을 하고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 대화의 마지막에 최악의 감정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갔다면 예상만큼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됐다는 느낌이 들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나쁜 일인 줄 알고 갔더라면 마음의 준비를 했을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나쁜 느낌도 좀 수그러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고 대화를 시작하고 끝내게 되면 나쁜 일일 때는 시종일관 나쁜 느낌이 들며 부정할 수 없이 부정적인 기분이 들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나쁘게 시작했던 시작점 때문에, 혹은 기만당한 것 같은 기분 때문에 부정적 느낌이 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프라이즈는 친구나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하는 것이지, 권력을 가진 상급자가 비대칭적인 힘을 가진 하급자에게 하기 적당한 이벤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서열이 명확할 때는 투명한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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